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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사람이 집을 만들고, 그것으로 끝일까? 요즘 들어 이런 저런 일로 한옥을 방문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 마을 저 지방 한옥을 다니다 보면, 사람이 집을 만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성냥갑 같은 천편일률의 양옥과는 달리 한옥은 같은 집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물론 집 모양이 각양각색이기도 하지만, 그 한옥들의 운명도 정말 천차만별이다. 과연 한옥의 운명만 그런 것일까?
어떤 한옥에 들어서면 주인 없는 헛간에서 고양이들이 꼬리를 감추며 나가는가 하면, 무성한 잡초에 파묻혀 지방문화재 제00호라는 간판만이 대한민국이 지정한 문화재 한옥임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한옥에는 청춘의 나이에 그 집으로 시집와서 그야말로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가 홀로 손님을 맞는다. 그 집의 며느리에서 안주인이 되었다가 이제는 기꺼이 그 집의 하인이 되어버린 할머니들이다. 마루 닦고, 마당 쓸고, 군불 지피고, 풀 뽑고 그 집 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워낙 넓은 한옥이라 할머니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가 보다. 그 집도 할머니의 외롭고 지치고 오랜 세월의 풍파에 시달린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 할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추녀 한 귀퉁이는 떨어져나가고, 무거운 댓돌은 기울어져 있고, 몇 해나 갈지 못한 초가집 용마름은 뒤틀려 있다.
간혹 어떤 한옥은 들어서기도 전에 올 봄에 붙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이 선명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인보다 먼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맞이한다. 황토 마당은 옛 여인의 빗질한 머릿결처럼 정연하게 비질이 되어 있고, 그 위로 수려한 추녀의 그림자가 가지런히 드리워져 있다. 뒤뜰에는 뚜껑이 덥힌 크고 작은 옹기들이 반들 반들 빛이 나고, 어디선가 구수한 된장 익는 내음이 나는 것 같다. 문에 발린 창호지는 구멍도 없이 팽팽하여 그 집의 위엄을 드러내고, 똑바로 선 댓돌에는 고무신이 놓여 있다. 이 고무신을 벗어 놓은 맨발이 매일 마루를 디디며 닦아 내는지, 들마루며 대청마루도 옹기 못지않게 반들거린다. 안채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그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인상 좋은 주인이 객을 맞는다. 그런데 집주인의 얼굴이 바로 그 집을 닮아 있다. 윤기 도는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주인의 미소가 가뿐한 추녀의 선을 닮아 있다.
이 한옥은 사람이 사는 집이다. 사람의 손길이 늘 다듬는 집이다. 사람이 지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늘 돌보고 키우는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 집을 만들고, 돌보기만 하고, 그 집은 아무것도 하는 게 없을까? 한옥에 사는 사람들을 보니, 그 집이 사람을 만들고 키우는 것 같다. 반듯한 집은 반듯한 사람을, 올곧은 집은 올곧은 사람을, 웅장한 집은 웅장한 사람을, 따뜻한 집은 따뜻한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처럼, 건강한 집이 건강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집을 만든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집이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물론 집이 사람을 만들만큼 사람이 집을 만들어야 되겠지만... 사람이 집을 만들 만큼 집이 그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집이 사람을 만든다면,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집에 대해서도, 한민족의 역사가 살고 있는 한옥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야 한다. 우리들의 집은 단순히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자는 곳이 아니라, 나의 삶을 만들고 나를 만드는 존재이다. 우리 삶의 역사가 배어 있는 한옥 역시 이제 그냥 세워두고 보존해야 하는 유물도 아니요, 구경만 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내 삶을 향기롭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번 휴가철에는 단 하루라도 별이 쏟아지는 대청마루에 누워 한여름 밤의 꿈을 꾸어보자. 한옥이 여유로운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가 한옥을 찾아보고 돌보아 준다면, 한옥도 우리를 돌보아 여유롭게 만들어 줄것이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약 력 ◆
중요민속자료 제172호 청송 성천댁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