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문화재위원회의 가슴 아픈 역사 1-2.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을 통해 본 고적조사위원



1-1.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을 통해 본 고적조사위원
  1-2.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을 통해 본 고적조사위원
  2. 현 문화재위원회의 일제 잔재들
  3. 문화재위원회 횡포와 문화재 훼손
  4. 올바른 문화재위원회를 위한 제언

 

4. 1920년대의 고적조사 사업
고적조사 5개년 계획 이후 1921년에 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를 보다 조직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 서무부 문서과에 속해 있었던 박물관 및 고적조사사업과와 기존에 종교과의 소관이었던 고사사 및 고건축물보존에 관한 사무를 학무국 안에 신설된 고적조사과에 통합 운영하게 되었다.
고적조사의‘ 정리시대’로 일컬어지는1920년대는 해마다 지속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나름대로 조선의 유적 및 유물에 대한 정리 작업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1910년대와 마찬가지로 1920년
대에도 한사군 지역 및 고구려 지역,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와 가야지격 등의 발굴조사가 진행되며, 지역이 전보다 확대되어가지 못하는 한계점을 나타낸다. 이렇게 낙랑지역과 가야지역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로 중국문명의 영향을 받은 외인론적이고 타율적인 성격의 규명에 있었으며,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역사적 유물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1920년대에는 긴축 재정에 따른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조사지역이 더욱 제한되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조사 목적의 필요성에 따라 조사지역을 제한한 것으로 생각된다.
1923년에 고적조사과의 인원감축과 함께 다음 해에는 고적조사과가 폐지되고, 고적, 고건축물, 명승천연기념물의 조사보존사업이 박물관과 학무국의 종교과로 이관되어 1931년 까지 지속되게 된다.
1920년대에는 고적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서편찬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 중심 기관은 조선사편찬위원회로, 일찍이 고적조사위원으로 참여했었던 사람들이 이후 조선사편찬위원회에도 관여하는 등 두 단체에 참여한 인물들의 관련성을 통해 두 사업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식민사관을 확고히 하기 위해 병행되어 나갔다.
 

 5. 1930년 이후의 고적조사사업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식민지내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고조와 세계공황으로 인하여 국내외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침략전쟁을 도모하게 되며, 대륙 침략에 따른 대륙병참기지화라는 식민지 정책의 전환에 따라 조사발굴사업은 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적조사사업에 종사해 왔던 학자들은 외부로부터 자금을 모아 조사를 계속 하고자 하였다. 구로이타 가츠미(黑板藤美)는 공사단체와 유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조선고적연구회를 설립하고 계속해서 고적조사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조선고적연구회는 경주와 평양지역의 조사를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라 고적조사사업 지역은 범위가 더욱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발족의 취지에 맞게 이들은 낙랑지역과 경주지역에 연구를 집중하여 식민지 지배를 역사고고학적으로 정당화 시킬 수 있도록 조사활동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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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 배포한 사진자료집에 실린 숭례문>


6.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의 제정 및 고적 조사위원회
1915년 10월 말에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나고 공진회를 위해 지어졌던 미술관을 그 해 12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변경하여 개관하게 된다. 그 다음해에는 조선총독부령으로 8조에 걸친「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고, 조선총독부 훈령으로「고적조사위원회」의 설치가 공포되었다.
고적조사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유적 및 유물 수집에 힘을 쏟게 되자 일본인 약탈자들에 의한 고분 도굴과 불법적인 매매가 성행하게 되었고, 일반 민중들의 항의가 고조되었다. 이에 법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보존규칙」을 제정하게 된 것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밝힌「 보존규칙」의 실시 의도는
첫째, 고대문화의 조사와 보존에는 내외학자에 의해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학술적으로 신중을 더하며, 조사 ? 보존은 모두 총독부가 스스로 통일 계획에 의하여 행함.
둘째, 조선의 문화재는 모두 조선 내에 보존하여 국외 산일을 방지하고, 이것으로 널리 학술과 사회교육의 자료로 하여 조선인의 문화적 자각에 충당할 것. 이 의미에서 박물관에서 조사와 보존과 진열의 사무를 겸하여 행하도록 함.
셋째, 이것들의 결과를 내외의 학계에 보고하고 학술연구의 자료로 제공하며, 반도 통치의 문화면을 말함에 실제 증거로 하고, 大冊의 고적조사보고서 및 화려한 고적도보를 인쇄하여 반포한다. 고적도보 제1권에서 5권에는 영문설명을 첨가하여 세계 각국에 기부한다.
조선 내의 문화재는 모두 조선 내에 보존하여 국회를 산일되는 것을 방지하고, 박물관에서 조사와 보존과 진열의 사무를 겸하여 행한다. 이는 반도 통치의 문화적 측면을 강조한 조치라 하여 유물의 현지보존주의와 고적조사사업과 박물관 사업의 연계성, 그리고 군사적 무단통치뿐만 아니라 문화적 지배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보존규칙」의 내용 중에는 고적 또는 유물을 발견한 자는 그 현상을 변경시키지말고 3일 이내에 지역의 경찰서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는 조항이나 고적 및 유적대장에 등록된 물건의 형상을 변경, 이전, 수선하거나 처분할 때는 그 소유자 또는 관리자는 경찰서장을 거쳐 조선총독에게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등의 규정들이 들어있다. 이와 같이 유물들이 식민지 권력 하에 놓이게 되어 조선의 문화재들에 대한 위치 규정은 식민지 권력에 맡겨진 상태가 되었다.
또한 부칙인「 古蹟及遺物調査事務心得」제 6조에는“ 실지 조사를 명령받은 고적조사위원은 총무국장의 허가 없이는 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여 역사적 실증 자료를 얼마든지 은폐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있다. 이를 관리하는 것은 경찰서장및 총무국장으로 되어있어서 일제가 고적조사의 실시 및 그 결과를 관 주도하에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총독부는 조선의 유물을 마음대로 발굴 조사하고, 은폐 조작하며, 반출할 수 있었다.
 

 7. 고적조사위원회의 성립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유적과 유물의 조사 보존을 위해 법령을 마련함과 동시에기구를 조직하였다. 1916년「 보존규칙」의 반포에 앞서 4월 26일 고적조사위원을 임명하였고, 7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29호로「 고적조사위원회규정」11조를 공포하였다. 고적조사위원회는 고적조사 계획과 고적, 건축물, 금석물 등의 보존방법을 정하고 이와 관련한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규정을 마련하였다
「고적조사위원회규정은 총 11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 3조와 제 11조에 의하면 위원장은 정무총감이 담당하고 위원은 총독부관계국의 고등관 중에서 임명하였다.
그 외 수명의 촉탁을 두고 총독부 고등관 중에서 간사를 임명하여 서무를 장리(掌理)케 하였다.
하지만 1916년 4월 26일 임명된 위원 15명 중에 실제 고적조사에 참여한 자는 5~6명에 불과하였다. 또 1917년 8월 25일까지 인원을 더 충원하여 총 27명이었으나 실제 고적조사에 참여한 자는 3분의 1에 불과하여 일제가 고적조사의 방향을 행정 중심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후에 고적조사위원회 사람들이 박물관 업무에 관계하는 모습이 보이며, 관할하는 부서가 같았다는 점에서도 이들이 박물관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고적조사 사업의 성격이 초기부터 계속적으로 일제의 조선 침략의 정당성 확보와,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것에 있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조사사업을 수행하였던 사람들이 박물관을 운영해나갔고, 그 수집품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면 박물관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제는 조선 침략 초기부터 꾸준히 고적조사사업을 시행하여 조선의 문화를 파악하려 노력하였다. 물론 이것은 조선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타율적인 민족이라는 타율성론과, 고대 일본과 한국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일선동조론을 확인하고 강조하려는 사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제는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적인 유물을 찾기 위해, 조선의 유물을 보호하고 보존한다는 논리를 이용하였다.
이렇게 고적조사사업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였던 한국 역사의 타율성론을 식민지의 대중들에게 보여주고자 박물관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즉 박물관 사업을 통해 식민통치 초기부터‘ 전통의 존중’이라는 형식을 통해 과거회귀적인 의식을 유도함으로써 조작된 과거로부터 현재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논리를 주입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해방 후 일본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문화재보호법이 만들어지고 문화재위원회도 이름만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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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을 간행. 그 당시 1호로 등록된 원각사지십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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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평우(黃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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