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중 정원가 예찬 14] 원림기를 통해 문(文)으로서 원(園)을 조성하고 문을 원에 실현한 유종원(柳宗元) 편



서화와 음악에 정통한 왕유(王維)는 자신의 망천(輞川)원림에 기존 자연 산수의 모방적 조성방식을 뛰어 넘어 외부경관을 원림 내에 끌어들이는 차경수법을 차용하여 회화적 산수경관을 자신의 원림 내에 조성하였다. 왕유의 발전된 원림 조성 방식은 조원예술의 중요 부분으로 계승되어 유종원 시대에 이르러 시문과 회화를 자신의 원림 내 실현하는 발전된 원림 조성 기법을 탄생시키게 된다. 

<유종원>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원림가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자는 자후(子厚)이며 유하동(柳河東) 혹은 하동 선생(河東 先生)으로, 당대 하동군(현 산서운성 영제 일대) 출신으로 저명한 문학가요 산문가(散文家), 사상가로서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중 한 사람이다. 당 고종 시대 재상인 유석(柳奭)의 후손으로 부친인 유진(柳鎮)은 어사중승(御史中丞) 등의 관직에 오른 명문 사대부 출신이다. 유 씨 집안은 장안 서부 교외에 밭과 수백 주의 수목과 과수를 재배하였고, 부친은 부근의 농민 곽탁타(곽 씨 성을 가진 등이 굽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당시 수목재배에 탁월한 기술을 가진 하급계층으로《柳河東集》중《種樹郭橐駝傳》에 나오는 인물)에게 청하여 집안의 원림을 관리토록 하였다《寄许京兆孟客书》.
 

 유원종은 자연스럽게 곽탁타(郭橐駝)로부터 일찍이 수목의 식재 기술 즉, 수목 생장의 원리와 함께 자연의 순리를 터득하게 된다. 유종원은 21세에 진사를 거쳐 장안의 감찰어사의 관직에 오르게 되고 당시 정치 및 관료의 부패를 목도한 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실패에 이르러 805년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된다. 유종원은 자신의 뜻이 좌절된 이시기에 곽탁타로부터 배운 원림 조영 원리를 실천하였다. 이 때문에 자신의 고단한 마음을 원림을 통해 치유하고 또 이상향을 원림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원림을 조성한 후 자신의 시문(時文)을 통하여 원림에 대하여 상술하였고, 동행한 사람들을 기록하여 기존의 원림가들과는 다른 원림기(園林記) 형식을 띈 작품들을 남겼다


<유주 대용담>


 원림기는 오늘날, 과거 원림의 조성배경과 공간구성, 원림향유 내용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림에서의 활동 즉 아회(雅會)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기록한 것은 서진(西晉) 시대 석숭(石崇)의 《금곡시서(金谷詩敍)》에서 참여자의 성명 직위 행위 등을 기록한 초기의 형태를 볼 수 있고, 송대(宋代)에 이르러서 실질적으로 원림기라 명명(命名)되어지고 보편화된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유종원은 송대 원림기(園林記)의 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교량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주지방에서 기거했던 10여 년 동안 유종원은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과 자연과의 융합을 꾀하였고, 각 명승지의 경색(景色)을 묘사하고자 산수여행기를 기록하였다.

《영주팔기永州八記》는 대표적 유종원의 산수여행기로 알려져 있으며 (《始得西山宴遊記》、《鈷潭記》、《鈷潭西小丘記》、《至小丘西小石潭記》、《袁家渴記》、《石渠記》、《石澗記》、 《小石城山記》).《永州八記》 그 중 제 4편은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그의 자연관을 엿 볼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從小丘西行百二十步,隔篁竹,聞水聲,如鳴佩環,心樂之。伐竹取道,下見小潭,水尤清冽。全石以為底,近岸,卷石底以出,為坻,為嶼,為嵁,為岩。青樹翠蔓,蒙絡搖綴,參差披拂”…, 同遊者:吳武陵,龔古,餘弟宗玄。隸而從者,崔氏二小生:曰恕己,曰奉壹 : 작은 구릉의 서편 백 이십여 보의 거리에 죽림이 있어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소리는 마치 몸에 지닌 옥패가 서로 부딪혀 내는 소리와 같아 마음이 매우 즐겁다. 대나무를 베어 길을 만드니 아래의 작은 못이 보이고 그물이 매우 맑고 깨끗하다. 작은 못은 돌로서 바닥을 형성하고 … 작고 큰 돌들은 작은 섬을 보는 듯하다. 짙푸른 수목과 등나무로 덮여… 바람에 따라 휘날린다). 無竹不成園, 無木不成林라는 죽림을 중심으로 돌· 물· 바람· 수목이라는 원림 요소들이 결합하여 산수의 요원하고 심원한 모습을 자아냈으며 그것을 향유하여 하나 되는 인간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용흥사 동릉원림경관(龍興寺東丘園林景觀), 법화 사서정(法華寺西亭), 고무담 서소릉 원림경관(鑽母潭西小丘園林景觀), 우계가원(愚溪家園) 등 다수의 원림을 조성하였다.
 유종원은 생애 말년에 고무담(鈷鉧潭)에 복거(卜居)와 상지(相地)를 근거로 토지를 구입하고 팔우원림(八愚園林)을 직접 설계하고 조성하였다. 이 원림에는 수천주의 귤나무와 유자나무가 식재 되었고 각 공간마다 조성방식 및 경색을 자세히 묘사하여 기록 하고 있다(《南中榮橘柚》,《新植海石榴樹》,《始見白髦題所植海石榴樹》 등).


<유종원의 강설 작가 무명>


 유종원은 신분을 초월한 백성과의 교류를 통하여 그들의 경험적 지식을 습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의 삶의 무게 또한 직접 경험하게 된다. 그로 인해 훗날 대중을 위한 원림 녹화사업을 시행하여 후대에 도시 원림 녹화를 시작한 최초의 관원으로 기록된다. 815년 유주(柳州) 지방의 책사(刺史)로 임관한 후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반도형인 유주 지역의 수해를 방지하고 도시녹화와 미화를 위하여 강변에 버드나무를 식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휴식과 이를 관상 할 수 있도록 하였다《種柳戲題》.
 

<유종원 석조비>


  흔히 유종원을 문(文)으로서 원(園)을 조성하고 문(文)을 원(園)에 실현한 인물이며 의경의 경계를 한층 심화 발전시킨 원림 설계자라고 평가 한다. 그러나 유종원은 사회적 학문적 경계가 없이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통해 사물 본연의 생리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 속에 본인의 삶을 투영하였다. 유종원이 이르기를, “逸其人, 因其地,全其天(저곳에 사는 사람들이 편안한 이유는 그곳의 지형을 따라 천연적인 본연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이해하며 자연과의 소통을 통하여 인위적인 결합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결합을 꿈꿨던 원림가로 예찬할 만하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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