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선인들은 수신(修身)을 위하여 대자연속에 자신을 맡기고 이상을 투영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였다. 이는 공(公)과 사(私)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유가(儒家)사상과 같이 자연 경관을 자신의 경내에 끌어 들임으로써 경외의 대상에서 자신과의 일체를 이루는 대상으로 자연을 변모시킨 것이다.
중국의 고대에는 왕족을 중심으로 한 원림경영이 주를 이루었으나, 토지의 사유화가 일반화 되었던 당조에 이르러 장안을 비롯한 낙양 일대에 귀족관료 및 거상을 비롯하여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사가원림(私家園林)의 조성이 활발하였다.
<낙양 전경>
당조 말기 가장 활발했던 사가원림 조성기에 낙양의 명원 중 으뜸은 두 명의 재상을 배출한 조군이씨(趙郡李氏) 집안의 원림이다. 또 원림역사 중 계성(計成)의 원야(園冶)와 더불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이덕유(李德裕)라 할 수 있다. 그는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걸친 고대 북방의 명문가 출신이며 그의 원림이 바로 당 말기 낙양 최고의 원림이었다.
<이덕유>
이덕유(李德裕, 787~850), 자는 문요(文饒)이며 당조 말기 저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로써, 조주(趙州: 현 하북시 조현)에서 출생하였다. 당 목종(穆宗) 직위 후 한림학사를 역임하였고 그 후 절강서부의 관찰사, 병부시랑 등을 두루 거친 후 당 말기 정치적 혼란기(5代王)를 거치며 부친인 이길보(李吉甫, 758~814)와 함께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훗날 중국의 6대 대표 정치가(관중, 상앙 제갈량, 왕안석, 장거정, 이덕유)의 한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덕유는 정치 생활의 대부분을 이종민(李宗閔), 우승유(牛僧儒)와 붕당투쟁(우이당정:牛李黨政)을 하였고,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결국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게 되고 수차례의 정치적 좌절을 겪게 된다. 이덕유는 외부로 신장 몽고 감소성 등 소수 민족을 진압하고 각 지역에 절도사를 파견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지역의 실정에 맞는 관군의 재배치로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재상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나 또 다시 붕당투쟁에 휘말려 애주(崖州)에서 끝내 병사하게 된다.
이덕유는 본래 장안(長安)의 주작문(朱雀門)의 대로를 낀 동편에 위치한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이길보와 이덕유 부자가 장안에 재임했던 기간에는 이곳에서 생활하였고, 이곳 저택의 뒤편에는 아름다운 원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덕유는 825년 절서(浙西, 현 절강서부)의 관찰사로 임관하였고, 당시 낙양(洛陽)의 남부에 평천산장(平泉山莊)을 조영하게 된다. 남에게 팔거나 불초한 지서(支庶)의 소속이 되게 하지 말라는 평천장고사는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도 널리 인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평천장은 그가 35세에 조영을 시작하여 일평생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장안 본가와는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별서는 당시 사가원림의 전형적인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시문 중에는 이 별서에 투영된 자신의 심미관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평천산장 유적>
평천장이 위치한 평천(平泉)지역은 낙양성 남쪽의 지명으로서 산장은 용문(龍門)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낙양은 낙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중국 역사 중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서안 남경 북경과 더불어 십삼왕조의 수도였으며 동한시기에는 이곳 낙양을 시점으로 실크로드가 형성되었을 만큼 번성하였다. 평천은 낙양팔경 중 하나로서 풍광이 우수하고 비옥한 지역으로 별서 경영에 적지 였으나 실질적으로 이덕유가 이곳에 별서를 조성한 것은 타향살이에 향수병이 깊었던 부친의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었다.
(“龍門南閱盡伊原,草樹人煙目所存。正是北州梨棗熟,夢魂秋日到郊園。”《平泉山居戒子孫記》). 당시 재상이었던 이덕유의 별서는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방 10리로 그 규모가 방대하며, 기이한 산수목석(山水木石)과 100여동에 이르는 정대루각(亭臺樓閣)이 조영되었고 진귀한 동물들이 원지(園池)에 놀고 있다고 기록되어 당시의 화려했던 원림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漁陽公石譜:宋朝).
<평천산장 유적>
평천장 조성 시 이덕유는 먼저 설계도 형식의 그림으로 구상한 후 원림 요소들을 배치하였고 수목과 산석의 산지, 수량 및 색채 등을 자세히 기록한 목록이 남아 있다(平泉山居草木記, 舊唐書李德裕傳 등).
기록에 의하면 평천장에는 약 70여 종의 화목이 식재 되어 있으며 산석(山石)은 태산석(泰山), 영벽석(靈壁), 태호석(太湖)등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름난 각 지역의 산석이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酉陽雜姐:衛會平泉莊有黃辛夷、紫丁香。......月桂,葉如桂,花淺黃色,四瓣,青蕊,花盛發,如柿葉帶棱,出蔣山。澳蓀,如高粱姜,生水中,出茅山。山茶,似海石榴,出桂州,蜀地亦有。貞桐,枝端抽赤黃條,條复旁對,分三層,花大如落蘇花,作黃色,一莖上有五六十朵。俱那衛,葉如竹,三莖一層,莖端分條如貞桐,花小,類木褂,出桂州....).
≪구당서(舊唐書)≫에 낙양의 동쪽에는 용문이 위치하고 남쪽에는 평천별서가 위치하여 푸른 죽림과 수석이 맑고 신비로우며 요원하게 느껴진다“(東都於伊闕南置平泉別墅,清流翠筱,樹石幽奇)”라 할 정도로 그 규모와 권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덕유의 평천장은 황실 원림과는 또 다른 권력의 중심에 위치한 권세가의 별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뿐 아니라 원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수신양덕을 배양하는 과거 선비의 정신세계와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더불어 이 원림은 “孝”의 이념이 근간이 되어 실천하여 꿈을 이룬 이상적 원림의 한 예라 할 수 있다(“鬻吾平泉者,非吾子孫也;以平泉一樹一石與人者,非佳子弟也”《平泉山居戒子孫記》).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한국산업인력공단 조경사 출제위원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집행이사
과거 선인들은 수신(修身)을 위하여 대자연속에 자신을 맡기고 이상을 투영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하였다. 이는 공(公)과 사(私)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유가(儒家)사상과 같이 자연 경관을 자신의 경내에 끌어 들임으로써 경외의 대상에서 자신과의 일체를 이루는 대상으로 자연을 변모시킨 것이다.
중국의 고대에는 왕족을 중심으로 한 원림경영이 주를 이루었으나, 토지의 사유화가 일반화 되었던 당조에 이르러 장안을 비롯한 낙양 일대에 귀족관료 및 거상을 비롯하여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사가원림(私家園林)의 조성이 활발하였다.
<낙양 전경>
당조 말기 가장 활발했던 사가원림 조성기에 낙양의 명원 중 으뜸은 두 명의 재상을 배출한 조군이씨(趙郡李氏) 집안의 원림이다. 또 원림역사 중 계성(計成)의 원야(園冶)와 더불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이덕유(李德裕)라 할 수 있다. 그는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걸친 고대 북방의 명문가 출신이며 그의 원림이 바로 당 말기 낙양 최고의 원림이었다.
<이덕유>
이덕유(李德裕, 787~850), 자는 문요(文饒)이며 당조 말기 저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로써, 조주(趙州: 현 하북시 조현)에서 출생하였다. 당 목종(穆宗) 직위 후 한림학사를 역임하였고 그 후 절강서부의 관찰사, 병부시랑 등을 두루 거친 후 당 말기 정치적 혼란기(5代王)를 거치며 부친인 이길보(李吉甫, 758~814)와 함께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훗날 중국의 6대 대표 정치가(관중, 상앙 제갈량, 왕안석, 장거정, 이덕유)의 한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덕유는 정치 생활의 대부분을 이종민(李宗閔), 우승유(牛僧儒)와 붕당투쟁(우이당정:牛李黨政)을 하였고,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결국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게 되고 수차례의 정치적 좌절을 겪게 된다. 이덕유는 외부로 신장 몽고 감소성 등 소수 민족을 진압하고 각 지역에 절도사를 파견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지역의 실정에 맞는 관군의 재배치로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재상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나 또 다시 붕당투쟁에 휘말려 애주(崖州)에서 끝내 병사하게 된다.
이덕유는 본래 장안(長安)의 주작문(朱雀門)의 대로를 낀 동편에 위치한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이길보와 이덕유 부자가 장안에 재임했던 기간에는 이곳에서 생활하였고, 이곳 저택의 뒤편에는 아름다운 원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덕유는 825년 절서(浙西, 현 절강서부)의 관찰사로 임관하였고, 당시 낙양(洛陽)의 남부에 평천산장(平泉山莊)을 조영하게 된다. 남에게 팔거나 불초한 지서(支庶)의 소속이 되게 하지 말라는 평천장고사는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도 널리 인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평천장은 그가 35세에 조영을 시작하여 일평생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장안 본가와는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별서는 당시 사가원림의 전형적인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시문 중에는 이 별서에 투영된 자신의 심미관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평천산장 유적>
평천장이 위치한 평천(平泉)지역은 낙양성 남쪽의 지명으로서 산장은 용문(龍門)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낙양은 낙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중국 역사 중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서안 남경 북경과 더불어 십삼왕조의 수도였으며 동한시기에는 이곳 낙양을 시점으로 실크로드가 형성되었을 만큼 번성하였다. 평천은 낙양팔경 중 하나로서 풍광이 우수하고 비옥한 지역으로 별서 경영에 적지 였으나 실질적으로 이덕유가 이곳에 별서를 조성한 것은 타향살이에 향수병이 깊었던 부친의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었다.
(“龍門南閱盡伊原,草樹人煙目所存。正是北州梨棗熟,夢魂秋日到郊園。”《平泉山居戒子孫記》). 당시 재상이었던 이덕유의 별서는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방 10리로 그 규모가 방대하며, 기이한 산수목석(山水木石)과 100여동에 이르는 정대루각(亭臺樓閣)이 조영되었고 진귀한 동물들이 원지(園池)에 놀고 있다고 기록되어 당시의 화려했던 원림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漁陽公石譜:宋朝).
<평천산장 유적>
평천장 조성 시 이덕유는 먼저 설계도 형식의 그림으로 구상한 후 원림 요소들을 배치하였고 수목과 산석의 산지, 수량 및 색채 등을 자세히 기록한 목록이 남아 있다(平泉山居草木記, 舊唐書李德裕傳 등).
기록에 의하면 평천장에는 약 70여 종의 화목이 식재 되어 있으며 산석(山石)은 태산석(泰山), 영벽석(靈壁), 태호석(太湖)등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름난 각 지역의 산석이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酉陽雜姐:衛會平泉莊有黃辛夷、紫丁香。......月桂,葉如桂,花淺黃色,四瓣,青蕊,花盛發,如柿葉帶棱,出蔣山。澳蓀,如高粱姜,生水中,出茅山。山茶,似海石榴,出桂州,蜀地亦有。貞桐,枝端抽赤黃條,條复旁對,分三層,花大如落蘇花,作黃色,一莖上有五六十朵。俱那衛,葉如竹,三莖一層,莖端分條如貞桐,花小,類木褂,出桂州....).
≪구당서(舊唐書)≫에 낙양의 동쪽에는 용문이 위치하고 남쪽에는 평천별서가 위치하여 푸른 죽림과 수석이 맑고 신비로우며 요원하게 느껴진다“(東都於伊闕南置平泉別墅,清流翠筱,樹石幽奇)”라 할 정도로 그 규모와 권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덕유의 평천장은 황실 원림과는 또 다른 권력의 중심에 위치한 권세가의 별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뿐 아니라 원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수신양덕을 배양하는 과거 선비의 정신세계와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더불어 이 원림은 “孝”의 이념이 근간이 되어 실천하여 꿈을 이룬 이상적 원림의 한 예라 할 수 있다(“鬻吾平泉者,非吾子孫也;以平泉一樹一石與人者,非佳子弟也”《平泉山居戒子孫記》).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한국산업인력공단 조경사 출제위원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집행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