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의미와 오늘의 선비像

준식
김 준 식
(전)안동문화원장
<약력>
김준식 (안동군자마을광산김씨 종손)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명예회장
(사)도산구곡문화연대 이사장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이사
(전)안동문화원장
공변된 말을 士論이라 하고, 당대의 제일류를 士流라 말하며, 천하의 의로운 목소리를 士氣라 하고, 군자가 죄없이 죽는 것을 士禍라 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하는 곳을 士林이라 말한다.
선비의 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 한다. 또한 시대적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대변하는 정신이며, 청렴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정신이다. 선비는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고 역사 의식에서 是是非非의 春秋정신을 신봉했다. 그들은 淸자를 선호하여 淸議, 淸白吏, 淸名, 淸流등의 용어를 즐겨 썼다.
선비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重義輕義’ 즉,‘ 舍利取義’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선비는‘先公後私’와‘抑强扶弱’의 정신이 있다. 外柔內剛의 개성은 선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선비는‘克己復禮’에 최종의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인내와 고행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오락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
조선조 오백여 년간의 통치 이념인 유교정신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흔치 않는 오랜왕조를 지속케 한 바탕이 되었으며 선비의 정신은 그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비의 정신 또는 선비의 상은 과거나 현재나 그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맥락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비의 제일 중요한 것은 중의경의 즉, 사리취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도 生과 義를 다 바라는 것이지만, 한 가지를 버린다면 생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지조이며 명분이다.
조선조 선비들은 모두 투철한 의리관, 도덕관, 국가관을 가지고 학행일치의 덕목들을 실천에 옮겼지만 선비 모두가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政派와 學派에 편승하여 대의명분을 망각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곧 眞儒가 아님을 말한다. 그런데 본질은 같더라도 선비의 정신, 선비의 상은 그 시대의 사정에 따라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한 소명의식이 투철하였던것이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조선조 통치 이념인 성리학에 못지 않게 실학과 북학이 대두되었다. 특히 남인계통의 선비와 일부 노론계통의 선비들인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형제, 이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실학과
북학의 수용으로 선진 과학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서 유배나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와 사회를 개혁, 일신하고져 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중인들과 신진 사류들의 선비상이 있었다.
새로운 시민 사회의 주축이 될 중인계층에 확산된 북학은 오경석, 유흥기를 매개로 하여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의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이항노’의 제자인‘유중교’는 선비의 지조는 왕권 위에 있다고 하였으며 같은 제자인‘유인석’은 을미의병을 일으켜 선비의 저항정신을 부르짖고, ‘박은식’은 애족계몽 사상을 고취시켰으며‘유인식’은 정부와 유림의 부패상을 비판하고‘장지연’은 유교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있을 때는 의병활동, 열사 지사적인 정신으로 구국 활동에 참여한 것도 선비들이었다.
그러면 현대에 있어서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선비의 정신 또는 선비의 상은 무엇인가.
역시 신지식, 신사고를 바탕으로 한 정의와 청렴, 도덕성,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국가관을 가져야만 한다. 곧 현대의 선비는 현실적, 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지녀야 한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줄 아는 성찰 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데 중심에 있어야 한다. 현대의 선비는 이제 신분적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며 시대 사회의 양심이며,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선비의 의미와 오늘의 선비像
공변된 말을 士論이라 하고, 당대의 제일류를 士流라 말하며, 천하의 의로운 목소리를 士氣라 하고, 군자가 죄없이 죽는 것을 士禍라 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하는 곳을 士林이라 말한다.
선비의 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 한다. 또한 시대적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대변하는 정신이며, 청렴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정신이다. 선비는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고 역사 의식에서 是是非非의 春秋정신을 신봉했다. 그들은 淸자를 선호하여 淸議, 淸白吏, 淸名, 淸流등의 용어를 즐겨 썼다.
선비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重義輕義’ 즉,‘ 舍利取義’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선비는‘先公後私’와‘抑强扶弱’의 정신이 있다. 外柔內剛의 개성은 선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선비는‘克己復禮’에 최종의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인내와 고행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오락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
조선조 오백여 년간의 통치 이념인 유교정신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흔치 않는 오랜왕조를 지속케 한 바탕이 되었으며 선비의 정신은 그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비의 정신 또는 선비의 상은 과거나 현재나 그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맥락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비의 제일 중요한 것은 중의경의 즉, 사리취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도 生과 義를 다 바라는 것이지만, 한 가지를 버린다면 생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지조이며 명분이다.
조선조 선비들은 모두 투철한 의리관, 도덕관, 국가관을 가지고 학행일치의 덕목들을 실천에 옮겼지만 선비 모두가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政派와 學派에 편승하여 대의명분을 망각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곧 眞儒가 아님을 말한다. 그런데 본질은 같더라도 선비의 정신, 선비의 상은 그 시대의 사정에 따라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한 소명의식이 투철하였던것이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조선조 통치 이념인 성리학에 못지 않게 실학과 북학이 대두되었다. 특히 남인계통의 선비와 일부 노론계통의 선비들인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형제, 이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실학과
북학의 수용으로 선진 과학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서 유배나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와 사회를 개혁, 일신하고져 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중인들과 신진 사류들의 선비상이 있었다.
새로운 시민 사회의 주축이 될 중인계층에 확산된 북학은 오경석, 유흥기를 매개로 하여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의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이항노’의 제자인‘유중교’는 선비의 지조는 왕권 위에 있다고 하였으며 같은 제자인‘유인석’은 을미의병을 일으켜 선비의 저항정신을 부르짖고, ‘박은식’은 애족계몽 사상을 고취시켰으며‘유인식’은 정부와 유림의 부패상을 비판하고‘장지연’은 유교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있을 때는 의병활동, 열사 지사적인 정신으로 구국 활동에 참여한 것도 선비들이었다.
그러면 현대에 있어서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선비의 정신 또는 선비의 상은 무엇인가.
역시 신지식, 신사고를 바탕으로 한 정의와 청렴, 도덕성,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국가관을 가져야만 한다. 곧 현대의 선비는 현실적, 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지녀야 한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할줄 아는 성찰 자세가 필요하며 사회의 모든 계층을 통합하고 조화시키는 데 중심에 있어야 한다. 현대의 선비는 이제 신분적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며 시대 사회의 양심이며,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