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
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겨레에 4,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국임을 세계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강제조약으로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행위를 말해 보겠습니다. 조약에서는 한국 독립을 지키겠다고 늘어놓고, 실은 협박과 기만으로 독립은 보호로, 보호는 합병으로 되어 이것이 마치 한국의 소원인 양 꾸몄으니 이는 한국은 물론 만국을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조국 독립을 잊지 않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참아가며 십 년을 견디어 왔습니다. 마침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한국의 독립에도 협조를 해 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파리장서(독립청원서) 중에서 -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면우 곽종석(免宇 郭鍾錫, 1846~1919) 선생과 심산 김창숙 (心山 金昌淑, 1879~1962) 선생 등 전국 137명의 유림대표가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보낸 운동으로 전문 2,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독립 청원서를 임시정부에서 영문으로 번역, 한문 원본과 같이 3,000부를 인쇄해 파리평화 회의는 물론 중국과 국내 각지에 배포했다. 이 파리장서운동에 함께 참여한 만송 윤중수(晩松 尹中洙, 1891~1931)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주로 도맡아서 했다. 천석 재산을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다 내놓고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 무순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41세가 되던 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만송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역사적 인물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가야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달윤산 자락에 형성된 화양마을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제판사(司帝判事) 벼슬을 지낸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장(尹將) 선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합천 묘산 묵와 고가(陜川 妙山 默窩 古家, 중요민속문화재 제206호,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안성길 150-6)는 조선 선조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윤사성(尹思晟)이 인조 때 지은 집으로 그의 10세손 만송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창건 당시에는 건물이 8채나 되고 100여 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사대부 집이었다.
집 전체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고택은 대지의 북쪽에 ‘ㄱ’자형 안채와 그 전면으로 ‘Τ’자형 사랑채와 중문채, 방앗간채를 두었으며, 좌우에 부속건물들을 배치했다. 가파른 경사지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단을 두고 터를 닦아 각각 건물을 배치하였고, 중요 건물 전면에는 마당을 두어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도록 했다. 가장 위쪽에 위치한 가묘는 남서쪽의 담장과 안채로 구획된 별도의 마당을 두었으며, 남쪽의 협문을 통해 진입하도록 주거동선과도 분리해 놓았다.
경사진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솟을대문이 한 눈에 들어온다. 훤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문지방이 인상적이다. 집주인의 여유가 느껴진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 문간채는 가운데 솟을대문을 설치하고 오른쪽은 방, 왼쪽은 헛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전경>

<보호수로 지정된 모과나무 >
넓은 사랑마당을 둔 사랑채로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默窩古家(묵와고가)’라 쓴 현판에 걸린 사랑채는 마당보다 높게 자연석을 이용해 허튼층 막쌓기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T’자형으로 4칸의 넓은 누마루는 앞쪽으로 돌출되게 지었다. 마당에 주초를 놓고 기단 높이만큼 키가 큰 원주를 세우고 지은 누마루는 동쪽과 남쪽면은 판벽을 설치하고 판문과 들창문을 내었고, 대문채를 향한 서쪽은 개방해 놓았다. 그리고 3면을 돌아가며 계자난간으로 꾸며 한층 격조를 높였다. 시야가 확 트인 이곳에서 집주인은 지나는 묵객과 함께 세상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으리라. 중앙에 2칸 방과 마루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방, 왼쪽으로는 다락을 배치했고, 각 실 전면에 툇마루를 두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다. 사랑채와 곳간채에 사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마루방 뒤편 하부공간을 이용해 중인방(中引枋) 상부에 설치된 반침은 감실(龕室,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곳)로 사용되었다. 이 감실은 밖에서 보면 ‘Y’자 형태를 한 부재들이 받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난 중문을 통해 안채영역으로 들어가면 안마당보다 높게 기단을 쌓고 정면 7칸의 ‘ㄱ’자형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과 부엌을 배치하고 앞쪽으로 툇간을 두었고, 왼쪽 ‘ㄱ’자로 꺾어서 건넌방, 작은 부엌을 두고 앞쪽으로는 쪽마루를 내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다. 특히 부엌은 앞 벽에 큼지막하게 넉살창을 냈다.

<안채마당>
안채 뒷마당을 지나 사당으로 오르는 길, 수령이 600년이나 된 모과나무가 긴 세월 모진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집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화양마을 입향조인 윤장(尹將)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제판사(司帝判事) 벼슬을 지내던 중 단종 원년(1453)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10여 년 전 도시생활을 접고 윤치환·황정아 선생 부부는 고향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하는 등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부는 고택의 보수와 관리를 위해 군청 담당공무원을 수도 없이 부딪혔고, 문화재 답사를 오는 교수나 전문가를 붙잡고 고택의 현실에 대해 하소연도 했다. 수년간 주인을 기다리며 덩그러니 자리만 지키던 고택은 부지런한 부부의 손길에 대답이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명품고택으로 선정되어 두 달간의 긴 공사를 마치고 손님맞이에 들어간다. 고택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집의 내력에 대해 설명도 해 주고, 따뜻한 차도 대접할 예정이란다.

<황정아 선생 부부>
황정아 선생은 인기척에 고운 미소를 지으며 오늘도 분주하게 움직인다. 집은 사람을, 사람은 집을 서로서로 닮아가고 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온몸을 바치신 할아버님의 숭고한 애국정신의 뜻을 받들며 생활하는 후손으로서의 당당함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전경>
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겨레에 4,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국임을 세계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강제조약으로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행위를 말해 보겠습니다. 조약에서는 한국 독립을 지키겠다고 늘어놓고, 실은 협박과 기만으로 독립은 보호로, 보호는 합병으로 되어 이것이 마치 한국의 소원인 양 꾸몄으니 이는 한국은 물론 만국을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조국 독립을 잊지 않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참아가며 십 년을 견디어 왔습니다. 마침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한국의 독립에도 협조를 해 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파리장서(독립청원서) 중에서 -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면우 곽종석(免宇 郭鍾錫, 1846~1919) 선생과 심산 김창숙 (心山 金昌淑, 1879~1962) 선생 등 전국 137명의 유림대표가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보낸 운동으로 전문 2,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독립 청원서를 임시정부에서 영문으로 번역, 한문 원본과 같이 3,000부를 인쇄해 파리평화 회의는 물론 중국과 국내 각지에 배포했다. 이 파리장서운동에 함께 참여한 만송 윤중수(晩松 尹中洙, 1891~1931)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주로 도맡아서 했다. 천석 재산을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다 내놓고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 무순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41세가 되던 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만송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역사적 인물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가야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달윤산 자락에 형성된 화양마을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제판사(司帝判事) 벼슬을 지낸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장(尹將) 선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합천 묘산 묵와 고가(陜川 妙山 默窩 古家, 중요민속문화재 제206호,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안성길 150-6)는 조선 선조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윤사성(尹思晟)이 인조 때 지은 집으로 그의 10세손 만송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창건 당시에는 건물이 8채나 되고 100여 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사대부 집이었다.
집 전체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고택은 대지의 북쪽에 ‘ㄱ’자형 안채와 그 전면으로 ‘Τ’자형 사랑채와 중문채, 방앗간채를 두었으며, 좌우에 부속건물들을 배치했다. 가파른 경사지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단을 두고 터를 닦아 각각 건물을 배치하였고, 중요 건물 전면에는 마당을 두어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도록 했다. 가장 위쪽에 위치한 가묘는 남서쪽의 담장과 안채로 구획된 별도의 마당을 두었으며, 남쪽의 협문을 통해 진입하도록 주거동선과도 분리해 놓았다.
경사진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솟을대문이 한 눈에 들어온다. 훤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문지방이 인상적이다. 집주인의 여유가 느껴진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 문간채는 가운데 솟을대문을 설치하고 오른쪽은 방, 왼쪽은 헛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전경>
<보호수로 지정된 모과나무 >
넓은 사랑마당을 둔 사랑채로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默窩古家(묵와고가)’라 쓴 현판에 걸린 사랑채는 마당보다 높게 자연석을 이용해 허튼층 막쌓기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T’자형으로 4칸의 넓은 누마루는 앞쪽으로 돌출되게 지었다. 마당에 주초를 놓고 기단 높이만큼 키가 큰 원주를 세우고 지은 누마루는 동쪽과 남쪽면은 판벽을 설치하고 판문과 들창문을 내었고, 대문채를 향한 서쪽은 개방해 놓았다. 그리고 3면을 돌아가며 계자난간으로 꾸며 한층 격조를 높였다. 시야가 확 트인 이곳에서 집주인은 지나는 묵객과 함께 세상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으리라. 중앙에 2칸 방과 마루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방, 왼쪽으로는 다락을 배치했고, 각 실 전면에 툇마루를 두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다. 사랑채와 곳간채에 사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마루방 뒤편 하부공간을 이용해 중인방(中引枋) 상부에 설치된 반침은 감실(龕室,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곳)로 사용되었다. 이 감실은 밖에서 보면 ‘Y’자 형태를 한 부재들이 받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난 중문을 통해 안채영역으로 들어가면 안마당보다 높게 기단을 쌓고 정면 7칸의 ‘ㄱ’자형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과 부엌을 배치하고 앞쪽으로 툇간을 두었고, 왼쪽 ‘ㄱ’자로 꺾어서 건넌방, 작은 부엌을 두고 앞쪽으로는 쪽마루를 내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다. 특히 부엌은 앞 벽에 큼지막하게 넉살창을 냈다.
<안채마당>
안채 뒷마당을 지나 사당으로 오르는 길, 수령이 600년이나 된 모과나무가 긴 세월 모진 풍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집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화양마을 입향조인 윤장(尹將) 선생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제판사(司帝判事) 벼슬을 지내던 중 단종 원년(1453)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10여 년 전 도시생활을 접고 윤치환·황정아 선생 부부는 고향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야하는 등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부는 고택의 보수와 관리를 위해 군청 담당공무원을 수도 없이 부딪혔고, 문화재 답사를 오는 교수나 전문가를 붙잡고 고택의 현실에 대해 하소연도 했다. 수년간 주인을 기다리며 덩그러니 자리만 지키던 고택은 부지런한 부부의 손길에 대답이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명품고택으로 선정되어 두 달간의 긴 공사를 마치고 손님맞이에 들어간다. 고택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집의 내력에 대해 설명도 해 주고, 따뜻한 차도 대접할 예정이란다.
<황정아 선생 부부>
황정아 선생은 인기척에 고운 미소를 지으며 오늘도 분주하게 움직인다. 집은 사람을, 사람은 집을 서로서로 닮아가고 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온몸을 바치신 할아버님의 숭고한 애국정신의 뜻을 받들며 생활하는 후손으로서의 당당함과 자부심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