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논산 백일헌 종택 (論山 白日軒 宗宅)



大風起天中 큰 바람은 하늘 가운데서 일어나고

落葉滿空山 낙엽이 빈산에 가득하다

月如將率星 달은 마치 장군 같아 별을 통솔하는 듯하고

星如兵衛月 별은 마치 병사가 달을 호위하는 것 같구나

                                                                       - 백일헌 이삼 장군이 12세에 쓴 시 -

 

<백일헌>


  백일헌 이삼(白日軒 李森, 1677~1735) 장군은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마을에 입향하여 세거의 터전을 마련한 부친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사길(李師吉, 1639~1703)과 모친 남양전씨(南陽田氏) 사이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이삼 장군은 12세가 되던 해 당대에 유명한 학자였던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 문하에서 수학했다. 명재 선생은 친자식처럼 항상 옆에 두고 가르쳤으며, 이삼 장군이 쓴 시에서 장군과 재상의 기상이 있음을 감지하고 ‘삼(森)’이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함평이씨 무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고 명재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은 이삼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성장했다. 28세가 되던 1705년(숙종 31)에 무과에 장원급제해 1713년 정주목사로 임명된 뒤 1717년 평안도병마절도사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사 등을 지내면서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였고, 경종 때는 소론으로서 경종의 신임을 받아 수원부사·우포도대장·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721년 총융사·한성부우윤, 1724년 어영대장을 지냈다. 1728년에 한성부좌윤으로 임명되었고, 1729년에는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며 1730년 6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는 등 30여년 간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세 임금을 모시면서 문무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장수로서의 기품을 간직한 이삼 장군은 당대의 최고의 명장이자 군사지략과 무예·군법·군제에도 조예가 깊었고, 군선과 무기 제작에도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728년(영조 4)에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이인좌(李麟佐, ?~1728)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고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 무신년에 일어나서 ‘무신란(戊申亂)’이라 부르는 이인좌의 난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이인좌와 정희량을 중심으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으로 영조와 노론을 몰아내고 밀풍군(密豊君)을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일으킨 난이다. 하지만 이삼 장군이 활동하던 당시는 당파간의 갈등이 치열했던 시기로 소론가문에서 수학했기에 당연히 소론계의 인물로 지목받아 수많은 견제와 시기를 받아 상소문과 탄핵에 시달리고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마을 논산 백일헌 종택(論山 白日軒 宗宅, 논산시 상월면 주곡길 37, 중요민속문화재 제273호). 주곡마을은 윗뜸·아래뜸·망가리에 청양양씨, 함평이씨, 전주이씨가 입향해 오백년 전부터 함께 살고 있는 전통마을로 예전에는 연산, 노성, 신도안으로 가는 길이 서로 교차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고 주막이 있어서 ‘술골(酒谷)’이라 불렀다.


<사랑채 전경>


  백일헌 종택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이바지한 공로로 영조가 내린 하사금으로 지은 집으로 1700년대 초 창건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상류주택의 구성 요소인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사당과 문간채 등 경사진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연환경과 조화롭게 지어졌다. 특히 일반적인 상류주택 배치와 다르게 각 건물들이 각각 방향을 달리하며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어 매우 역동적이고 자유스럽다.

 

 한 계단 한 계단, 백일헌 종택 솟을대문으로 들어선다. 자연스레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은행나무에 눈길이 간다. 이삼 장군이 생전에 말고삐를 매어두었던 나무라서 그럴까. 고택은 전체적으로 보면 ‘ㅁ’자형, 한 쪽이 짧은 ‘?’자형 안채, ‘ㄴ’자형 바깥사랑채, 작은사랑채, 광채 등 4채가 결합되어진 형태이다.


<사랑채>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둔 ‘ㄴ’자형 바깥사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큰사랑방과 누마루, 중문간을 배치했으며 큰사랑방 앞까지 2단으로 툇마루가 연결되어 있어 마을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중문 오른쪽에 위치한 ‘ㅡ’자형 작은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작은사랑방 앞으로 툇마루를 두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일반적인 상류주택과는 다르게 솟을대문과 같은 선상에 중문을 두고 있어 안채로 출입이 매우 개방적이다. 한 쪽이 짧은 ‘?’자형 안채는 전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 5칸, 오른쪽 3칸을 두었다. 대청 앞에는 별도의 툇마루가 있고, 후원 쪽으로 난 문은 판문 대신 창호문이 달려 있다. 왼쪽은 안방과 웃방, 부엌을 배치했고, 오른쪽은 건넌방과 작은부엌을 두었다. 특히 며느리가 사용하던 건넌방에는 전용 툇마루와 낮은 담장으로 두른 작은마당을 두었는데 이는 다른 한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공간구성이다. 건넌방 툇마루 끝에는 판문을 달아 후원으로 나갈 수 있게도 했다. 이는 외부 출입이 제한되었던 며느리를 위한 집안어른들의 특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안채 전경>

<안대청>


안채 맞은편에 있는 광채는 사랑채보다는 낮게 지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광과 문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당은 이 고택에서 가장 높은 장소인 사랑채 오른쪽 언덕 위에 있고 별도의 담장이 둘러져 있다. 


<이신행>


  백일헌 종택에는 고택이외에도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공신의 책봉과 관련된 교서(敎書) 등 많은 고문서와 백일헌유집(白日軒遺集) 등 서적, 언월도(偃月刀), 철퇴(鐵槌), 영정(影幀), 은배(銀杯) 등 무관(武官)과 관련된 많은 유품들도 남아있는데 일부 백제군사박물관에 전시도 하고 수장고에도 보관 중이다.

 

  지금 종택은 함평이씨 함은군 종중의 11대 종손 이신행(李信行, 1959년생) 선생 부부가 쓸고 닦으며 집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신행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계속 살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생활했던 기억은 생생하다고 하신다. 그래서일까. 종택을 돌보는 두 분의 손길이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인다. 이신행 선생 부부는 종택으로 내려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삼 장군의 혼이 서린 고택을 알리고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꾸미는데 온 신경을 다 쏟고 계신다. 선생은 아직 공직생활을 하고 있어 이곳에서 생활하지는 못하지만 가능한 한 자주 내려오려고 노력하신다. 한 가지 더 바램이 있다면 그동안 지방문화재로 있을 때는 관리나 보수의 수준이 너무 미미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됐으니 국가문화재에 걸맞게 원형을 지킬 수 있도록 복원을 하고 지속적인 보수·관리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선조가 물려주신 집을 자신들이 관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나 지자체에서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고 관리·보수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도 잊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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