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소식 가득한 봄날, 연둣빛을 머금은 나무들에서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꽃구경을 나선 인파로 말미암아 도로는 꽉 막혔지만, 여행의 설렘 덕분에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진다.
이번에 방문할 곳은 충남 홍성에 있는 조응식 가옥(趙應植 家屋, 중요민속문화재 제198호). 장맛비처럼 아주 세차게 내리는 봄비 탓에 조금 서둘러 길을 나서며, 장렬왕후를 배출한 집안인 조응식 가문의 역사를 먼저 되돌아본다.
조선 제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인조의 정비(正妃)인 인열왕후의 뒤를 이어 인조의 계비로 책봉되었으나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어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는다. 이후 법적인 아들 효종과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고, 그가 입어야 할 상복(喪服) 문제를 두고 일으킨 서인과 남인 간 정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 있어야 했던 인물로,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던 분이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야산이 감싸고 있는 조응식 가옥은 남향으로 앉아 있다. 양주 조씨 장령공파 14대 첨지공 조태벽 옹이 입향조로, 병자호란 때 이곳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로 낙향, 터를 잡은 것이다. 19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가옥은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전통가옥으로, 입향조 조태벽 옹의 12대 종손인 조환웅(1952년생, 좌측 사진) 선생이 살고 있다.
반갑게 안부 먼저 여쭙고는 집을 돌아보기로 한다. 솟을대문에 들어서자 사랑채가 손님을 반긴다. 바로 ‘우화정(雨花亭)’이다. 사진으로만 익혔던 ‘천하태평(天下太平)’ 네 글자와 글자들 사이에 적힌 사괘(四卦) 문양에 눈이 먼저 간다. 화방벽으로 쌓은 사랑채 누마루 하부 공간 외벽 정면에 기와 조각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이다.
사랑채는 정면 5.5칸, 측면 1.5칸 규모로 작은사랑, 대청, 큰사랑,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에 올라 담장 너머로 눈길을 주니 주변 풍광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누마루 정면에는 ‘수루(睡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한여름 날, 3면으로 개방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혀 놓고선 오수(午睡·낮잠)를 즐기기에 그만인 이 누마루에 참 걸맞은 이름이구나 싶다.
작은사랑 앞에 원래 우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랑채 기둥머리에 우물을 덮는 지붕을 매었던 흔적만 남아 있다. 선생의 조부께서 생존해 계실 때 집에 도둑이 들었단다. 급하게 도망을 치던 도둑은 우물이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빠져 죽었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 조부께서 우물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안채는 사랑채 뒤에 나란히 ‘ㄱ’ 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채 앞마당은 다른 고택들과 달리 넓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정면 6칸, 측면 4.5칸으로 대청을 기준으로 해서 좌측에는 안방과 부엌이, 우측에는 건넌방과 작은 부엌이 딸려 있다. 안채에도 ‘보현당(寶賢堂)’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최근에 만들어 건 것으로, 한국 전쟁 당시 이 집이 북한 인민군 사령부로 쓰일 때조차도 어려운 이를 돌보고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던 조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조환웅 선생이 제작해 걸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우측 넓은 터에는 안사랑채인 별당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인 안사랑채는 대청, 안사랑, 부엌으로 구성돼 있으며, 옛날에는 살림을 물려준 맏종부가 노후를 보내던 곳으로 주로 접객 장소로 사용했다.
안사랑채 앞에는 외부에서 바로 통하는 협문이 있는데, ‘얼방문(?方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얼(?)’이라는 글자는 임금 또는 큰 어르신이란 뜻의 백제 때의 말로, 오사면·성지면·얼방면 등을 통합해 ‘장곡면’으로 개편하면서 이 지역에서만 사용하던 옛 글자를 알리고자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고 한다.
행랑채는 정면 6.5칸, 측면 1칸인 ‘一’ 자형으로 광, 헛간, 대문, 부엌이 달린 방으로 구성돼 있다. 행랑채 앞에 있는 개울을 건너면 연못이 있는데, 원래 그곳에는 청한루(靑閑樓)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광채와 헛간이 있다.

집 안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고 나서 뒷동산까지 구경시키며 조환웅 선생은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들려준다. 이 집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 기대앉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마흔 살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내려왔단다. “그때 이혼당할 뻔했어요.”라며 빙긋 웃는 선생. 집이 1984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되었지만, 그 당시 관리가 어려워 집은 점점 훼손돼 가고 형편이 없었다 한다. 처음 보수를 시작할 때 전통가옥에 대해 잘 몰라 담당 공무원들에게만 맡겨 놓았더니 집을 제대로 보수하지 못하거나, 집주인인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아서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숱하게 언쟁을 벌여가며 여기까지 온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회상하며, 이런 긴 시간이 흐른 뒤인 이제야 얼추 집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한다.
선생의 집도 숙박 체험 공간으로 개방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단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을 아침에 만나면 머리가 깨끗하고 맑아지는 느낌이라며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한단다. 한옥에서 보낸 하룻밤은 삭막한 도시인들에게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여유로움을 만끽한 최고의 시간.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했지만, 한옥은 여전히 고향 같은 편안한 휴식처다.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고택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쉬면서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선생은 “언제든, 누구든 대환영입니다.”라며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겠단다. 그리고 지금은 고택을 복원하고 보수하는 외적인 일에만 치중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고택에 깃들어 있는 역사나 문화를 스토리텔링화해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인다. 선생께 앞으로 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여쭸더니 “지금까지 집은 거의 원형대로 복원·보수했으니 이제는 집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서 그 옛날 울창했던 모습을 다시 찾고 싶고, 더 나아가서 수목원을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꿈이지요.”라며 소년처럼 발그레 수줍어한다.
선생이 손수 내어준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한 시간이 긴 여운을 남긴다. 집을 지켜야 하는, 집안을 지켜야 하는 숙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선생을 바라보며, 이제 앞으로 2, 30년은 선생만을 위한 시간도 할애가 되기를 속으로 가만가만 빌어본다.

꽃소식 가득한 봄날, 연둣빛을 머금은 나무들에서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꽃구경을 나선 인파로 말미암아 도로는 꽉 막혔지만, 여행의 설렘 덕분에 마음은 한결 여유로워진다.
이번에 방문할 곳은 충남 홍성에 있는 조응식 가옥(趙應植 家屋, 중요민속문화재 제198호). 장맛비처럼 아주 세차게 내리는 봄비 탓에 조금 서둘러 길을 나서며, 장렬왕후를 배출한 집안인 조응식 가문의 역사를 먼저 되돌아본다.
조선 제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인조의 정비(正妃)인 인열왕후의 뒤를 이어 인조의 계비로 책봉되었으나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어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는다. 이후 법적인 아들 효종과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고, 그가 입어야 할 상복(喪服) 문제를 두고 일으킨 서인과 남인 간 정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 있어야 했던 인물로,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던 분이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야산이 감싸고 있는 조응식 가옥은 남향으로 앉아 있다. 양주 조씨 장령공파 14대 첨지공 조태벽 옹이 입향조로, 병자호란 때 이곳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로 낙향, 터를 잡은 것이다. 19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가옥은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전통가옥으로, 입향조 조태벽 옹의 12대 종손인 조환웅(1952년생, 좌측 사진) 선생이 살고 있다.
반갑게 안부 먼저 여쭙고는 집을 돌아보기로 한다. 솟을대문에 들어서자 사랑채가 손님을 반긴다. 바로 ‘우화정(雨花亭)’이다. 사진으로만 익혔던 ‘천하태평(天下太平)’ 네 글자와 글자들 사이에 적힌 사괘(四卦) 문양에 눈이 먼저 간다. 화방벽으로 쌓은 사랑채 누마루 하부 공간 외벽 정면에 기와 조각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것이다.
사랑채는 정면 5.5칸, 측면 1.5칸 규모로 작은사랑, 대청, 큰사랑,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에 올라 담장 너머로 눈길을 주니 주변 풍광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누마루 정면에는 ‘수루(睡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한여름 날, 3면으로 개방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혀 놓고선 오수(午睡·낮잠)를 즐기기에 그만인 이 누마루에 참 걸맞은 이름이구나 싶다.
작은사랑 앞에 원래 우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랑채 기둥머리에 우물을 덮는 지붕을 매었던 흔적만 남아 있다. 선생의 조부께서 생존해 계실 때 집에 도둑이 들었단다. 급하게 도망을 치던 도둑은 우물이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빠져 죽었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 조부께서 우물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안채는 사랑채 뒤에 나란히 ‘ㄱ’ 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안채 앞마당은 다른 고택들과 달리 넓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정면 6칸, 측면 4.5칸으로 대청을 기준으로 해서 좌측에는 안방과 부엌이, 우측에는 건넌방과 작은 부엌이 딸려 있다. 안채에도 ‘보현당(寶賢堂)’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최근에 만들어 건 것으로, 한국 전쟁 당시 이 집이 북한 인민군 사령부로 쓰일 때조차도 어려운 이를 돌보고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던 조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조환웅 선생이 제작해 걸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우측 넓은 터에는 안사랑채인 별당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인 안사랑채는 대청, 안사랑, 부엌으로 구성돼 있으며, 옛날에는 살림을 물려준 맏종부가 노후를 보내던 곳으로 주로 접객 장소로 사용했다.
안사랑채 앞에는 외부에서 바로 통하는 협문이 있는데, ‘얼방문(?方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얼(?)’이라는 글자는 임금 또는 큰 어르신이란 뜻의 백제 때의 말로, 오사면·성지면·얼방면 등을 통합해 ‘장곡면’으로 개편하면서 이 지역에서만 사용하던 옛 글자를 알리고자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고 한다.
행랑채는 정면 6.5칸, 측면 1칸인 ‘一’ 자형으로 광, 헛간, 대문, 부엌이 달린 방으로 구성돼 있다. 행랑채 앞에 있는 개울을 건너면 연못이 있는데, 원래 그곳에는 청한루(靑閑樓)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광채와 헛간이 있다.
집 안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고 나서 뒷동산까지 구경시키며 조환웅 선생은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들려준다. 이 집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 기대앉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마흔 살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내려왔단다. “그때 이혼당할 뻔했어요.”라며 빙긋 웃는 선생. 집이 1984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되었지만, 그 당시 관리가 어려워 집은 점점 훼손돼 가고 형편이 없었다 한다. 처음 보수를 시작할 때 전통가옥에 대해 잘 몰라 담당 공무원들에게만 맡겨 놓았더니 집을 제대로 보수하지 못하거나, 집주인인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아서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숱하게 언쟁을 벌여가며 여기까지 온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회상하며, 이런 긴 시간이 흐른 뒤인 이제야 얼추 집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한다.
선생의 집도 숙박 체험 공간으로 개방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단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을 아침에 만나면 머리가 깨끗하고 맑아지는 느낌이라며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한단다. 한옥에서 보낸 하룻밤은 삭막한 도시인들에게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여유로움을 만끽한 최고의 시간.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했지만, 한옥은 여전히 고향 같은 편안한 휴식처다.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고택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쉬면서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선생은 “언제든, 누구든 대환영입니다.”라며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겠단다. 그리고 지금은 고택을 복원하고 보수하는 외적인 일에만 치중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고택에 깃들어 있는 역사나 문화를 스토리텔링화해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덧붙인다. 선생께 앞으로 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여쭸더니 “지금까지 집은 거의 원형대로 복원·보수했으니 이제는 집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서 그 옛날 울창했던 모습을 다시 찾고 싶고, 더 나아가서 수목원을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꿈이지요.”라며 소년처럼 발그레 수줍어한다.
선생이 손수 내어준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한 시간이 긴 여운을 남긴다. 집을 지켜야 하는, 집안을 지켜야 하는 숙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선생을 바라보며, 이제 앞으로 2, 30년은 선생만을 위한 시간도 할애가 되기를 속으로 가만가만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