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봉화 송석헌 (奉化 松石軒)



길에서 묻고 싶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길이 어디쯤인지. 내가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습관처럼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산들은 겨울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연일 계속되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는 여행자의 마음을 더욱더 움츠러들게 한다. 경북 봉화는 우리나라 오지 중의 오지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로, 조선 시대에는 난세를 피해 이곳에 은둔한 선비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그래서 봉화에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아 수양하고 공부하던 선비들이 살던 고택들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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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송석헌의 보수 전 모습>


<봉화 송석헌의 보수 전 모습>

 오늘은 봉화 송석헌(奉化 松石軒, 중요민속자료 제249호)을 찾아간다. 송석헌으로 들어가는 선돌 마을 입구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다. 상복을 입은 권동재 선생께서 마중을 나와 말없이 앞장서 걷더니 여막을 설치해 놓은 영풍루로 먼저 안내한다. 문상 절차에 대한 사전 준비도 없이 무작정 내려온 자신을 탓하며 조심스레 인사를 올렸다. 상중이라 방문하기가 송구스러워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사전 양해를 구하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선생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놓는다. 부친 생전에 “전 아버님처럼 삼년상은 못해 낼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으나 선생의 부친이 그랬듯이 권동재 선생도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그곳에 머문다고 했다. 부친께서 간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얘기 도중에 ‘아버지’란 말만 나와도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에 가득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부친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는 목소리에 힘이 느껴지고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다. 부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이 시대 마지막 선비로 살아온 모습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기억에 대해 여쭈었더니, 선생은 한마디로 “효자지요, 평생을 효자로 사셨어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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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마지막 선비 故 동애 권헌조 옹의 모습

 봉화 송석헌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맑은 바람과도 같은 선비 한 분이 살고 있었다. 8대조부터 300여 년을 지켜온 이 집에서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동애 권헌조(權憲祖, 83세로 2010년 12월 13일 작고) 옹(翁)이 갓 쓰고 도포 입고 80여 년을 살았다. 365일을 하루같이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의관을 갖추고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산소가 있는 집 뒷산에 올라 문안을 드리고 산소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부친의 반대로 초등학교만 다닌 권헌조 옹은 조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해 이 지방에서 마지막 남은 선비이자 한학자로 통했다 한다. 자식들이 도시로 모시고 가겠다고 해도 권헌조 옹은 그때마다 부모님께서 살던 이 집에서 떠날 수 없다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겠다고 했단다. 선생은 부친께 지금의 삶에 대해 혹시 불편함은 없는지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께서는 주어진 삶을 그냥 살아왔을 뿐이라고. 할아버지도, 삼촌도 다들 그렇게 살아왔다고. 현재에 살고 있지만, 부친의 삶은 여전히 과거 속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며 선생은 가만히 부친을 추억한다. 300여 년의 세월 동안 한집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송석헌. 선생의 부친께서 이 집과 함께한 시간도 송석헌의 역사에 더해지고 있었다.

선생은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에 내려와 살 작정이라 한다. 그리고 집을 보수해 주는 정부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는다. 정부가 많은 예산을 들여 보수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하며, 비록 작은 집이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고택을 하나라도 지키기 위해 잘 보존하고 관리할 거라 한다. 이곳에서 글을 쓰면서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며 지내고 싶다면서 눈을 지그시 감는다. 선생의 부친이 그랬듯 선생의 어깨에도 송석헌이 잠잠히 내려앉아 있다.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에 있는 봉화 송석헌은 1700년대 무렵 사복사정(司僕侍正: 임금이 타고 다니는 말, 수레 등을 관리하는 관청인 사복시의 최고위 관원)으로 추증된 권이번(權以番, 1678-1763)이 아들 권명신(權命申, 1706-1778 )에게 지어준 가옥이다. 선돌 마을 입구에 산을 등지고 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이 집은 조선 후기 영남지방 사대부 저택의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잘 보여 준다. 특히 지반의 경사가 심한 곳이어서 건물의 앞쪽 기단을 높게 했고,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서 있다. 축대가 높아서 마당에서 바라보면 건물이 매우 커 보이지만 기둥의 높이는 낮다. 이는 가옥을 지을 때 권이번이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가옥 규제에 따라 낮게 설계를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와 연결하여 계단을 단 영풍루(迎風樓)는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영풍루의 특이한 한옥구조 때문에 건축을 공부하는 이들이 이곳을 자주 방문하기도 한다. 사랑 우측으로 나란히 선암재(仙巖齋)가 있고 그 뒤로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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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공사를 위해 해체한 모습>


<보수 공사를 위해 해체한 모습>

 하지만, 지금 송석헌은 보수하느라 집기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렸고, 안채와 사랑채는 해체돼 있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난 건물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지난해 6월에 공사를 시작해 연말까지 보수공사를 끝내기로 했지만, 송석헌은 뼈대만 남기고 300년이란 긴 시간이 깃든 집의 역사도, 그동안 살아온 삶의 흔적까지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보수공사를 위해 가설된 덧집을 지붕 삼아 머지않아 다가올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으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물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둘러본다. 권헌조 옹이 생전에 머물던 방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옹이 남긴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이제 돌아가야겠다며 선생께 인사를 드렸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생은 말없이 거상(居喪)하고 있는 방 앞에서 곡을 했다.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선생의 목소리가 가슴을 에게 한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죄인이라 밖에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며 매서운 한겨울에 그렇게 한데에서 지내는 선생의 모습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인사를 드리고서 송석헌 대문을 나설 때, ‘동시대를 살면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효(孝)의 현장을 만났구나!’ 하는 감동과 더불어, 아름다운 풍경을 봤을 때의 기쁨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뭔지 모를 먹먹함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삭막하기만 하던 겨울 산이 어느덧 편안하게 옆으로 다가와 함께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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