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
一堂幽寂小溪灣 그윽하고 고요한 당에 작은 시내 굽이졌으니
始覺人生老去閒 비로소 인생이 노년에 들어 한적함을 알겠네.
閒處自然隨事簡 한적한 곳에 저절로 그리되어 일마다 간단하니
終朝無語對靑山 아침 내내 말없이 푸른 산을 대한다네.
- 簡齋 先生의 詩 -
임진왜란, 왜적은 내륙 깊숙이 안동까지 밀려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지만 18세 중일은 병든 조모를 간호하며 그저 애만 태우고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급기야 왜적은 마을까지 들이닥쳐 할 수 없이 피난을 가야만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피신을 시켰지만 생명이 위급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진 조모는 피신시킬 수는 없어 죽음을 각오하고 조모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집안까지 들어온 왜병은 중일을 끌고나가 죽이려 했다. 그러자 중일은 “나 같은 불효한 손자는 죽여도 좋지만 80세의 조모만은 꼭 살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효자이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효심어린 중일의 말에 감동받은 왜병들은 그를 살려주며 조모를 간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난 후에 혹시라도 다른 왜병이 쳐들어오면 또 다시 화를 당할 수도 있다”며 신표로 깃발과 칼 한 자루를 주면서 이것을 보여 주고 사정 얘기를 하라고 당부했다. 진심어린 중일의 효성에 감복한 왜적은 집안의 물건을 하나 약탈하지 않고 물러갔으며, 조모의 병세도 점차 나아졌다.

<변성렬>
<간재 선생의 11대 종손 변성렬 선생 부부>
왜적도 감동한 ‘하늘이 내린 효자’ 간재 변중일(簡齋 邊中一, 1575~1660)은 아버지 원주변씨(原州邊氏) 변경장(邊慶長)과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변영청(邊永淸)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거쳐 남원부사 대구부사 상의원정 등을 역임했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간재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고, 7세에 글공부를 시작할 때는 어버이를 섬기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효경(孝經)》을 가장 먼저 익힐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간재 선생은 효도뿐만 아니라 1597년(선조 30) 가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바로 화왕산성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1552~1617) 장군 진영으로 찾아가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치기로 맹세하고 전란이 그칠 때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죽기를 다해 싸워서 왜병을 물리쳤다. 신념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정한 법도 안에서 한결같이 걸어가는 삶을 살다간 간재 선생은 ‘효도와 충성’ 모두에서 후세에 길이 남을 귀감이 되었으며, 항상 경(敬)을 가슴에 품고 진솔하고 바른 간(簡)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다. 그의 사후 119년이 지난 후 지역의 유림들은 간재 선생의 충효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불천위(不遷位, 국가와 유림이 영원히 기릴 만하다고 인정한 훌륭한 인물을 대상으로 4대 봉사(奉祀)가 끝난 뒤에도 사당에 모시고 계속 제사를 지내며 기리는 신위(神位)를 말한다)로 모시고 있다.
간재 선생이 태어난 안동 서후면 금계리, ‘금제(琴堤)’ 또는 검제(黔堤)마을로 알려진 곳에 있는 원주변씨 간재 종택 및 간재정 (原州邊氏 簡齋 宗宅 및 簡齋亭, 경북 민속문화재 제131호, 경북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720-30)으로 간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17 세기에 걸쳐 창건되고 중수되었다.
서후면 금계리는 원주변씨 변광(邊廣)이 당시 금계리에 살고 있던 권철경(權哲經)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원주변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고, 지금도 이곳에는 30가구 90여명의 집안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간재 종택은 도로에서도 잘 보인다. 농로를 따라 홍살문을 통과하면 뒷산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골짜기를 이룬 호젓하고 전망 좋은 곳에 종택과 사당, 간재정이 자연지형에 순응하며 자리를 잡고 있다.

<안동>
<사랑채 누마루>
‘ㅁ’자형 정침은 앞쪽으로 사랑채와 중문간채가 있고 그 뒤편에 안채와 좌우익사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사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앞쪽에 난간을 둘러놓은 누마루와 사랑방, 사랑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정면에 보이는 기둥은 모두 원기둥이고 누마루 아래로 연결되는 기둥은 팔각형으로 다듬은 기둥을 썼다. 이처럼 기둥의 모양새를 달리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동양의 우주관에 따른 조형원리를 건물조형에 이입시켰다.
안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상방을 두었다. 안채와 연결된 좌익사는 부엌과 고방을, 우익사는 부엌과 사랑마루와 연결되는 책방을 배치했다.
사랑채 앞에 있는 별당인 무민당(無憫堂)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좌로부터 온돌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무민당 주련은 간재 선생이 쓴 싯구와 집안의 가훈으로 삼은 《명심보감(明心寶鑑)》중 경행록(景行錄)의 한 구절을 써서 걸어 놓았다.
寶貨用之有盡 재물은 쓰면 다함이 있지만
忠孝享之無窮 충효는 향유해도 끝이 없다

<간재정>

<간재정>
간재 선생이 만년에 고향 집의 동쪽 언덕 위에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지은 정자, ‘간재(簡齋)’로 오른다. 오후 햇살을 받은 정자는 선생의 성품을 닮은 듯 담백하면서도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一’자형으로 지은 정자는 1칸짜리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하나씩 배치했다. 간재 선생이 지은 ‘간재기(簡齋記)’에는 “나는 재주가 모자라고 뜻도 게을러 큰일을 경영해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도 못하고, 왜적이 침입해 나라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몸을 바쳐 수치와 분통을 씻지도 못했으니 내가 장차 세상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래서 자취를 거두어 몸을 숨기고 그 뜻을 담아 이 서재의 이름을 지었다”라는 간재정을 지은 연유를 써 놓았다.
종택 입구에 있는 홍살문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정충효각(旌忠孝閣)은 간재 선생의 충성과 효행을 기려 1686년(숙종 12) 나라에서 정려한 것이다.
간재 선생의 11대 종손 변성렬(邊聖烈, 1960년생)선생의 목소리가 저 아래서 들린다. 직장 때문에 대구와 종택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어 피곤할 법도 한데 항상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다. 필자는 선생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종택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던 터.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집안 곳곳에 간재 선생의 꼿꼿한 선비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한창 공사 중인 정자, 비록 미완성이지만 한 번 올라보라며 저만치 성큼성큼 오른다. 검제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연지에 연꽃까지 핀다면 시 한 수, 노래 한 자락은 저절로 나올 듯싶다.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우리 고택이 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음이,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음이 좋다.
<안동>
一堂幽寂小溪灣 그윽하고 고요한 당에 작은 시내 굽이졌으니
始覺人生老去閒 비로소 인생이 노년에 들어 한적함을 알겠네.
閒處自然隨事簡 한적한 곳에 저절로 그리되어 일마다 간단하니
終朝無語對靑山 아침 내내 말없이 푸른 산을 대한다네.
- 簡齋 先生의 詩 -
임진왜란, 왜적은 내륙 깊숙이 안동까지 밀려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지만 18세 중일은 병든 조모를 간호하며 그저 애만 태우고 집안에 머물러 있었다. 급기야 왜적은 마을까지 들이닥쳐 할 수 없이 피난을 가야만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피신을 시켰지만 생명이 위급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진 조모는 피신시킬 수는 없어 죽음을 각오하고 조모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집안까지 들어온 왜병은 중일을 끌고나가 죽이려 했다. 그러자 중일은 “나 같은 불효한 손자는 죽여도 좋지만 80세의 조모만은 꼭 살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효자이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효심어린 중일의 말에 감동받은 왜병들은 그를 살려주며 조모를 간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가 떠난 후에 혹시라도 다른 왜병이 쳐들어오면 또 다시 화를 당할 수도 있다”며 신표로 깃발과 칼 한 자루를 주면서 이것을 보여 주고 사정 얘기를 하라고 당부했다. 진심어린 중일의 효성에 감복한 왜적은 집안의 물건을 하나 약탈하지 않고 물러갔으며, 조모의 병세도 점차 나아졌다.
<변성렬>
<간재 선생의 11대 종손 변성렬 선생 부부>
왜적도 감동한 ‘하늘이 내린 효자’ 간재 변중일(簡齋 邊中一, 1575~1660)은 아버지 원주변씨(原州邊氏) 변경장(邊慶長)과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변영청(邊永淸)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거쳐 남원부사 대구부사 상의원정 등을 역임했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간재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고, 7세에 글공부를 시작할 때는 어버이를 섬기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효경(孝經)》을 가장 먼저 익힐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간재 선생은 효도뿐만 아니라 1597년(선조 30) 가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바로 화왕산성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1552~1617) 장군 진영으로 찾아가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치기로 맹세하고 전란이 그칠 때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죽기를 다해 싸워서 왜병을 물리쳤다. 신념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정한 법도 안에서 한결같이 걸어가는 삶을 살다간 간재 선생은 ‘효도와 충성’ 모두에서 후세에 길이 남을 귀감이 되었으며, 항상 경(敬)을 가슴에 품고 진솔하고 바른 간(簡)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다. 그의 사후 119년이 지난 후 지역의 유림들은 간재 선생의 충효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불천위(不遷位, 국가와 유림이 영원히 기릴 만하다고 인정한 훌륭한 인물을 대상으로 4대 봉사(奉祀)가 끝난 뒤에도 사당에 모시고 계속 제사를 지내며 기리는 신위(神位)를 말한다)로 모시고 있다.
간재 선생이 태어난 안동 서후면 금계리, ‘금제(琴堤)’ 또는 검제(黔堤)마을로 알려진 곳에 있는 원주변씨 간재 종택 및 간재정 (原州邊氏 簡齋 宗宅 및 簡齋亭, 경북 민속문화재 제131호, 경북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720-30)으로 간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17 세기에 걸쳐 창건되고 중수되었다.
서후면 금계리는 원주변씨 변광(邊廣)이 당시 금계리에 살고 있던 권철경(權哲經)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원주변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고, 지금도 이곳에는 30가구 90여명의 집안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간재 종택은 도로에서도 잘 보인다. 농로를 따라 홍살문을 통과하면 뒷산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골짜기를 이룬 호젓하고 전망 좋은 곳에 종택과 사당, 간재정이 자연지형에 순응하며 자리를 잡고 있다.
<안동>
<사랑채 누마루>
‘ㅁ’자형 정침은 앞쪽으로 사랑채와 중문간채가 있고 그 뒤편에 안채와 좌우익사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사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앞쪽에 난간을 둘러놓은 누마루와 사랑방, 사랑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정면에 보이는 기둥은 모두 원기둥이고 누마루 아래로 연결되는 기둥은 팔각형으로 다듬은 기둥을 썼다. 이처럼 기둥의 모양새를 달리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동양의 우주관에 따른 조형원리를 건물조형에 이입시켰다.
안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상방을 두었다. 안채와 연결된 좌익사는 부엌과 고방을, 우익사는 부엌과 사랑마루와 연결되는 책방을 배치했다.
사랑채 앞에 있는 별당인 무민당(無憫堂)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좌로부터 온돌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무민당 주련은 간재 선생이 쓴 싯구와 집안의 가훈으로 삼은 《명심보감(明心寶鑑)》중 경행록(景行錄)의 한 구절을 써서 걸어 놓았다.
寶貨用之有盡 재물은 쓰면 다함이 있지만
忠孝享之無窮 충효는 향유해도 끝이 없다
<간재정>
<간재정>
간재 선생이 만년에 고향 집의 동쪽 언덕 위에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지은 정자, ‘간재(簡齋)’로 오른다. 오후 햇살을 받은 정자는 선생의 성품을 닮은 듯 담백하면서도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一’자형으로 지은 정자는 1칸짜리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하나씩 배치했다. 간재 선생이 지은 ‘간재기(簡齋記)’에는 “나는 재주가 모자라고 뜻도 게을러 큰일을 경영해 백성에게 혜택을 주지도 못하고, 왜적이 침입해 나라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몸을 바쳐 수치와 분통을 씻지도 못했으니 내가 장차 세상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래서 자취를 거두어 몸을 숨기고 그 뜻을 담아 이 서재의 이름을 지었다”라는 간재정을 지은 연유를 써 놓았다.
종택 입구에 있는 홍살문 좌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정충효각(旌忠孝閣)은 간재 선생의 충성과 효행을 기려 1686년(숙종 12) 나라에서 정려한 것이다.
간재 선생의 11대 종손 변성렬(邊聖烈, 1960년생)선생의 목소리가 저 아래서 들린다. 직장 때문에 대구와 종택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어 피곤할 법도 한데 항상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다. 필자는 선생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종택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던 터.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집안 곳곳에 간재 선생의 꼿꼿한 선비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한창 공사 중인 정자, 비록 미완성이지만 한 번 올라보라며 저만치 성큼성큼 오른다. 검제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연지에 연꽃까지 핀다면 시 한 수, 노래 한 자락은 저절로 나올 듯싶다.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우리 고택이 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음이,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