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사랑했다, 갔다

<비석>
청암 이하복(靑菴 李夏馥, 1911~1987)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1944년 일본이 학생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몰아내는 것에 격분해 교편을 내던지고 고향인 서천으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이하복 선생은 농한기인 겨울, 사랑방마다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던 청년들을 설득해 가마니를 공동으로 짜서 판매하는 ‘가마니조합’을 만들어 자립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는 학교에 다니기 힘든 학생을 위해 1946년에는 동강고등공민학교, 1949년에는 동강학원과 동강중학교를 설립해 교이제민(敎而濟民), 교육보국의 이념 아래 면학정신과 자아계발을 통해 국가사회에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을 육성한다는 건학이념을 내세웠다. 이하복 선생은 우리나라 근·현대 격동기를 몸소 거치며 사회계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생을 떠나게 되면 묘 옆에는 아무 비석도 세우지 말고 그저 자연석에 ‘왔다, 사랑했다, 갔다’를 새겨 달라고 하셨다.
겨울 날씨는 예측하기가 힘이 든다. 폭설과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강추위에 이미 한 차례 연기를 한 터. 이하복 선생의 장남이신 이기원(李基遠, 1930년생)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큰 길은 다 녹아서 다니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하신다. 서울에서 2시간 남짓 달려 동서천IC를 나와 10분 정도. 저 멀리 나지막한 야산아래 하얀 모자를 쓴 초가집지붕이 보인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서천>
<서천 이하복 가옥 전경>
서천 이하복 가옥(舒川 李夏馥 家屋,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 57번길 32-3, 중요민속문화재 제197호)은 200여 년 전 한산이씨(韓山李氏)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선생의 18대손 이병식 선생이 처음 안채 3칸을 짓기 시작한 후 그 아들이 20세기 초 사랑채, 아래채, 위채(웃채) 등을 지었고, 후에 새로 증축해 지금에 이르렀다.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초가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 오른쪽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아래채와 위채가 마주보고 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 초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안채>
<안채>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칸으로 지어진 ‘ㅡ’자형 건물이었으나, 후대에 늘려 6칸 규모의 ‘ㄱ’자 건물로 왼쪽 끝에 부엌을 두고 안방, 윗방, 대청, 아랫방을 배치하고 아랫방 앞으로 헛청을 덧달아 내었다. 안방 앞과 뒤쪽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초가집인데도 앞쪽 지붕 길이를 길게 나오게 해 다시 한 번 올려다보게 만든다. 사랑채는 정면 4칸 규모의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대문간, 부엌, 사랑방을 배치하고, 앞쪽과 오른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아래채는 사랑채 오른쪽으로 중문을 사이에 두고 특이하게 북쪽을 바라보게 지었다. 정면 5칸 ‘ㅡ’자형 건물의 아래채는 왼쪽부터 부엌, 안방, 윗방, 광이 있고 안방 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이곳은 며느리가 거처하는 곳으로 북쪽에 넓은 마당을 두어 며느리가 외부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고 독립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어른들의 배려가 담긴 건물이다. 위채는 대홍수로 인해 소실되었던 건물을 복원한 건물로 결혼한 아들이 오리엔테이션 기간을 거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면 4칸의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외양간, 방, 마루를 배치했다.

<이기원>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에 지금까지 걸어 온 길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이기원 선생>
선친인 이하복 선생 못지않게 화려한 이력을 지닌 이기원 선생은 서울대·국방대학원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1995년 은퇴한 후 서울에서 홀로 내려와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고향집과 함께 하고 있다. 선생과 함께 집안을 한 바퀴 돌아봤다. 평생을 학자로 생활하신 팔순의 선생께는 시골생활이 힘겨울 법도 한데 집안 구석구석 선생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방, 곳간, 창고 등에는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그릇, 제기 등 각종 주방기구들, 각종 서적들과 고문서들이 정결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젠 점점 사라져서 보기 힘든 각종 농기구과 목공기구, 가마니를 짜던 기계, 베틀, 가마, 달구지 등 작은 이름표를 달고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생활사박물관이라 해도 될 만큼 선조들의 손때 묻은 유물들이 집안 곳곳에 남아 있다.
선생께 아버지 이하복은 어떤 분이셨는지 여쭸다. 허허 웃으시더니 많은 기억들을 꺼내놓는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농촌계몽운동에 학교까지 설립한 부자집이라고 부러워했지만 자식들에게는 굉장히 엄한 분이셨다. 선생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상경해 대학생활을 할 때도 학비를 한 푼도 보내주지 않아서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고, 동생들까지도 선생이 책임져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고집스런 아버지 성격이 있었기에 이 집도 지켜낼 수 있었다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농촌 주택개량사업이 추진될 때도 이 집만은 절대 훼손할 수 없다고 완고하게 버텼기에 보존할 수 있었다.

<전시용>

<전시용>
<생활사박물관이라 해도 될 만큼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선생이 내려온 지 벌써 수년째,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이나 지자체에서 훼손되거나 노후된 것을 보수하는데 지원을 해 준다고 하지만 초가를 관리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매년 계속되는 초가지붕 이엉잇기, 집안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각종 생활용품과 유물들을 보존하는데 돈도 적지 않게 들어갔다. 선생은 4남 6녀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선친이 남긴 이 지역의 모든 유산을 재단으로 넘기고 ‘청암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이하복 가옥의 보존 관리와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전통문화를 계승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선친이 세우고 선생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강학원, 한 때는 학생수가 1,000명이 넘는 큰 학교였지만 지금은 전교생이 56명이 남은 동강중학교에 대한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선생은 남은 과제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다고 하신다. 집안 곳곳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 사람들은 옛 것이라고 자꾸 버리지만 우리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고, 우리의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다. 이것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지어 학생들에게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 소중한 교육자료가 되었으면 하신다.
자작자작 장작 타는 소리, 구수한 나무 타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초가지붕 너머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선생은 또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신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우리네 고향 모습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가 해내기엔 조금 힘겨운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왔다, 사랑했다, 갔다
<비석>
청암 이하복(靑菴 李夏馥, 1911~1987)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1944년 일본이 학생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몰아내는 것에 격분해 교편을 내던지고 고향인 서천으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이하복 선생은 농한기인 겨울, 사랑방마다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던 청년들을 설득해 가마니를 공동으로 짜서 판매하는 ‘가마니조합’을 만들어 자립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는 학교에 다니기 힘든 학생을 위해 1946년에는 동강고등공민학교, 1949년에는 동강학원과 동강중학교를 설립해 교이제민(敎而濟民), 교육보국의 이념 아래 면학정신과 자아계발을 통해 국가사회에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주체적 인간을 육성한다는 건학이념을 내세웠다. 이하복 선생은 우리나라 근·현대 격동기를 몸소 거치며 사회계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생을 떠나게 되면 묘 옆에는 아무 비석도 세우지 말고 그저 자연석에 ‘왔다, 사랑했다, 갔다’를 새겨 달라고 하셨다.
겨울 날씨는 예측하기가 힘이 든다. 폭설과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강추위에 이미 한 차례 연기를 한 터. 이하복 선생의 장남이신 이기원(李基遠, 1930년생)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큰 길은 다 녹아서 다니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하신다. 서울에서 2시간 남짓 달려 동서천IC를 나와 10분 정도. 저 멀리 나지막한 야산아래 하얀 모자를 쓴 초가집지붕이 보인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서천>
<서천 이하복 가옥 전경>
서천 이하복 가옥(舒川 李夏馥 家屋,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 57번길 32-3, 중요민속문화재 제197호)은 200여 년 전 한산이씨(韓山李氏)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선생의 18대손 이병식 선생이 처음 안채 3칸을 짓기 시작한 후 그 아들이 20세기 초 사랑채, 아래채, 위채(웃채) 등을 지었고, 후에 새로 증축해 지금에 이르렀다.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초가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 오른쪽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아래채와 위채가 마주보고 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 초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안채>
<안채>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칸으로 지어진 ‘ㅡ’자형 건물이었으나, 후대에 늘려 6칸 규모의 ‘ㄱ’자 건물로 왼쪽 끝에 부엌을 두고 안방, 윗방, 대청, 아랫방을 배치하고 아랫방 앞으로 헛청을 덧달아 내었다. 안방 앞과 뒤쪽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초가집인데도 앞쪽 지붕 길이를 길게 나오게 해 다시 한 번 올려다보게 만든다. 사랑채는 정면 4칸 규모의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대문간, 부엌, 사랑방을 배치하고, 앞쪽과 오른쪽에 툇마루를 두었다. 아래채는 사랑채 오른쪽으로 중문을 사이에 두고 특이하게 북쪽을 바라보게 지었다. 정면 5칸 ‘ㅡ’자형 건물의 아래채는 왼쪽부터 부엌, 안방, 윗방, 광이 있고 안방 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이곳은 며느리가 거처하는 곳으로 북쪽에 넓은 마당을 두어 며느리가 외부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고 독립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어른들의 배려가 담긴 건물이다. 위채는 대홍수로 인해 소실되었던 건물을 복원한 건물로 결혼한 아들이 오리엔테이션 기간을 거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면 4칸의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외양간, 방, 마루를 배치했다.
<이기원>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에 지금까지 걸어 온 길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이기원 선생>
선친인 이하복 선생 못지않게 화려한 이력을 지닌 이기원 선생은 서울대·국방대학원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1995년 은퇴한 후 서울에서 홀로 내려와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고향집과 함께 하고 있다. 선생과 함께 집안을 한 바퀴 돌아봤다. 평생을 학자로 생활하신 팔순의 선생께는 시골생활이 힘겨울 법도 한데 집안 구석구석 선생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방, 곳간, 창고 등에는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그릇, 제기 등 각종 주방기구들, 각종 서적들과 고문서들이 정결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젠 점점 사라져서 보기 힘든 각종 농기구과 목공기구, 가마니를 짜던 기계, 베틀, 가마, 달구지 등 작은 이름표를 달고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생활사박물관이라 해도 될 만큼 선조들의 손때 묻은 유물들이 집안 곳곳에 남아 있다.
선생께 아버지 이하복은 어떤 분이셨는지 여쭸다. 허허 웃으시더니 많은 기억들을 꺼내놓는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농촌계몽운동에 학교까지 설립한 부자집이라고 부러워했지만 자식들에게는 굉장히 엄한 분이셨다. 선생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상경해 대학생활을 할 때도 학비를 한 푼도 보내주지 않아서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고, 동생들까지도 선생이 책임져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고집스런 아버지 성격이 있었기에 이 집도 지켜낼 수 있었다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농촌 주택개량사업이 추진될 때도 이 집만은 절대 훼손할 수 없다고 완고하게 버텼기에 보존할 수 있었다.
<전시용>
<전시용>
<생활사박물관이라 해도 될 만큼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선생이 내려온 지 벌써 수년째,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이나 지자체에서 훼손되거나 노후된 것을 보수하는데 지원을 해 준다고 하지만 초가를 관리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매년 계속되는 초가지붕 이엉잇기, 집안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각종 생활용품과 유물들을 보존하는데 돈도 적지 않게 들어갔다. 선생은 4남 6녀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선친이 남긴 이 지역의 모든 유산을 재단으로 넘기고 ‘청암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이하복 가옥의 보존 관리와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전통문화를 계승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선친이 세우고 선생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강학원, 한 때는 학생수가 1,000명이 넘는 큰 학교였지만 지금은 전교생이 56명이 남은 동강중학교에 대한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선생은 남은 과제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다고 하신다. 집안 곳곳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 사람들은 옛 것이라고 자꾸 버리지만 우리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고, 우리의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다. 이것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지어 학생들에게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 소중한 교육자료가 되었으면 하신다.
자작자작 장작 타는 소리, 구수한 나무 타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초가지붕 너머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선생은 또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신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우리네 고향 모습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가 해내기엔 조금 힘겨운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