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고 종택 전경>
어버이에게는 효도하며 자식 된 직분을 부지런히 하고
자손들은 선조에게 보답하고 종통을 중히 여겨라.
일상생활에서도 근본을 두터이 하고, 직분을 다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고,
행실을 조심하며 사람을 편하게 대하고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말며,
용모를 바르게 하고 절도를 조심하고, 평소 근검하고 가례는 간소하게 하라.
책을 읽어 이를 분별하라는 방책을 모두 터득하는 위기지학 하라.
공을 내세우지 말며 칭찬을 부끄럽게 생각하라.
- 난고 선생이 지은 종훈(宗訓) -
절정을 이루던 한겨울 추위가 잠시 주춤하던 날,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려 영덕을 찾았다. 구불구불 했던 도로는 4차선도로로 시원스레 뚫렸다. 아름다운 해안절경을 잘 볼 수 없는 대신 시간을 훨씬 단축시켜 놓았다.
영해면 원구마을에 영덕 영양남씨 난고 종택(盈德 英陽南氏 蘭臯 宗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71호,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1길 13-11)이 자리 잡고 있다. 난고 종택은 1624년 난고 남경훈(蘭臯 南慶薰, 1572~1612) 선생의 아들인 안분당 남길(安分堂 南佶, 1595~1624)이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세웠다. 조선 중기 학자인 난고 선생은 아버지 남의록(南義祿, 1551~1620)와 어머니 춘천박씨(春川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난고 선생은 약관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때 영해의병장으로 나서 전투에 참전하여 경주성과 영천성을 탈환하는데 일조를 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이 일어나자 또다시 창녕으로 달려가 전투에 참전했다. 7년간 전투에 참여해 의병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지만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리고 자신은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향시(鄕試)와 사마시(司馬試)에도 합격해 성균관 진사(進士)에 선발되었지만 벼슬의 뜻을 접고 스스로를 ‘난고거사(蘭?居士)’ 라 부르며 학문과 심신 수양에 매진하며 지냈다. 남의록이 임진왜란 후 수탈이 극심한 영해부사를 탄핵 하자 도리어 관원을 능멸하고 무리들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난고 선생은 아버지의 원통함을 호소해 아버지 대신 옥고를 치렀다. 결국 무죄로 판명되고 영해부사는 파직되었지만 난고 선생은 이때 겪은 고초로 병을 얻어 아버지보다 8년이나 앞서 생을 마감했다.

<사랑채>
우리나라 대부분의 종택이 그렇듯 난고 종택 역시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속한다. 중구봉(重九峯) 아래 안정되고 평화로운 지세 갖추고 있는 이곳에 원래는 연지가 있었지만 사토로 땅을 메우고 집을 지었다. 그러면 천년동안 자손이 번성한다고 했다. 그래서 일까.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영양남씨 난고종파는 영해에 뿌리를 내린 후 단 한 번도 양자를 들여온 적이 없이 종손이 종가를 지키며 살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글을 빌린 적도 없이 스스로 독학으로 학문을 익힌 난고 선생의 후손들은 선생으로부터 9대에 이르기까지 한 대도 빠짐없이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냈다. 또한 400년 종가의 역사가 내려오면서 한 대도 빠짐없이 간찰이 남아있으며 자손들의 과거나 시험에 관련된 문서들은 문규로 정해서 모두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만취헌>
조선 시대 경북 상류주택의 생활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난고 종택은 대문채, 정침, 만취헌, 불천위사당, 별묘, 난고정 등이 400여 년 동안 시대를 달리 하며 지어졌지만 큰 변화 없이 종가의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만취헌(晩翠軒)이 눈에 들어온다. 만취헌은 난고 선생의 3대손인 만취헌 남노명(晩翠軒 南老明, 1642~1721)이 건립해 강학과 종사를 보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건물로, 4통간 대청마루 좌측에 웃방과 아랫방을 두고 있다. 원래 사랑채는 안채 영역인 ‘ㅁ’자형 정침의 오른쪽에 있었지만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사랑채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별채형 사랑채가 많아지게 되었다. 만취헌도 유교적 교리의 강화와 남성중심적인 공간이 확대되면서 별채형 사랑채를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안채 전경>
안채영역이라 할 수 있는 정침은 난고 선생의 아들인 남길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주로 영동이나 안동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뜰집 형태로 여성영역인 안채와 남성영역인 사랑채, 행랑영역이 결합된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정방형 안마당을 두어 안정감 있게 구성했다. 대문간의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헛간과 고방이 있고, 우측에는 안사랑과 사랑마루로 이뤄진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안채는 6칸의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상방을 두고 있으며, 안방 뒤에는 쌀이나 술독 등 각종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도장을 두었다. 안채와 연결된 좌익사는 정지칸과 통래칸을 두었고, 우익사는 고방 2칸과 중방을 배치했다.

<난고정>
난고정(蘭臯亭)은 난고 선생이 의병활동에서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면서 연못 위에 작은 정자를 처음 지었는데 그 후에 다시 지은 2층 누각형태의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4칸의 통간대청을 두고 좌우에 1칸 반 정도의 온돌방을 두었다.
그밖에도 별묘(別廟)와 다른 종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선생을 기리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사랑채와 남석규 선생>
수백 년 살아있는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난고 종택에는 난고 선생의 17세 종손 남석규(南錫圭, 1946년생) 선생 부부가 살고 계신다. 그동안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계셔서 자주 들어오긴 했지만 2007년 부친이 작고하시면서 대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집으로 들어왔다. 몇 십 년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만 이제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되어 두 분은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하셨다. 남석규 선생이 생활하고 계시는 만취헌 사랑방으로 안내를 하신다.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있는 온돌방, 사람 사는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남석규 선생은 새벽이면 일어나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것을 시작으로 선조들이 살던 그대로의 공간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이제 곧 명절. 친척들과 자녀들이 고향을 찾아온다. 두 분은 생활하기에 불편해도 그나마 감수하면서 생활하고 있지만 도시에서 살고있는 자녀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내려온다고 하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고 하신다. 하지만 자녀들과 손주들도 마음 푸근한 고향과 가슴 따뜻하게 안아주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그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닐 듯싶다. 아마 집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리라. 활기가 넘치는 그 날을.
<난고 종택 전경>
어버이에게는 효도하며 자식 된 직분을 부지런히 하고
자손들은 선조에게 보답하고 종통을 중히 여겨라.
일상생활에서도 근본을 두터이 하고, 직분을 다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고,
행실을 조심하며 사람을 편하게 대하고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말며,
용모를 바르게 하고 절도를 조심하고, 평소 근검하고 가례는 간소하게 하라.
책을 읽어 이를 분별하라는 방책을 모두 터득하는 위기지학 하라.
공을 내세우지 말며 칭찬을 부끄럽게 생각하라.
- 난고 선생이 지은 종훈(宗訓) -
절정을 이루던 한겨울 추위가 잠시 주춤하던 날,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려 영덕을 찾았다. 구불구불 했던 도로는 4차선도로로 시원스레 뚫렸다. 아름다운 해안절경을 잘 볼 수 없는 대신 시간을 훨씬 단축시켜 놓았다.
영해면 원구마을에 영덕 영양남씨 난고 종택(盈德 英陽南氏 蘭臯 宗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71호,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1길 13-11)이 자리 잡고 있다. 난고 종택은 1624년 난고 남경훈(蘭臯 南慶薰, 1572~1612) 선생의 아들인 안분당 남길(安分堂 南佶, 1595~1624)이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세웠다. 조선 중기 학자인 난고 선생은 아버지 남의록(南義祿, 1551~1620)와 어머니 춘천박씨(春川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난고 선생은 약관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때 영해의병장으로 나서 전투에 참전하여 경주성과 영천성을 탈환하는데 일조를 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이 일어나자 또다시 창녕으로 달려가 전투에 참전했다. 7년간 전투에 참여해 의병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지만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리고 자신은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향시(鄕試)와 사마시(司馬試)에도 합격해 성균관 진사(進士)에 선발되었지만 벼슬의 뜻을 접고 스스로를 ‘난고거사(蘭?居士)’ 라 부르며 학문과 심신 수양에 매진하며 지냈다. 남의록이 임진왜란 후 수탈이 극심한 영해부사를 탄핵 하자 도리어 관원을 능멸하고 무리들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난고 선생은 아버지의 원통함을 호소해 아버지 대신 옥고를 치렀다. 결국 무죄로 판명되고 영해부사는 파직되었지만 난고 선생은 이때 겪은 고초로 병을 얻어 아버지보다 8년이나 앞서 생을 마감했다.
<사랑채>
우리나라 대부분의 종택이 그렇듯 난고 종택 역시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속한다. 중구봉(重九峯) 아래 안정되고 평화로운 지세 갖추고 있는 이곳에 원래는 연지가 있었지만 사토로 땅을 메우고 집을 지었다. 그러면 천년동안 자손이 번성한다고 했다. 그래서 일까.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영양남씨 난고종파는 영해에 뿌리를 내린 후 단 한 번도 양자를 들여온 적이 없이 종손이 종가를 지키며 살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글을 빌린 적도 없이 스스로 독학으로 학문을 익힌 난고 선생의 후손들은 선생으로부터 9대에 이르기까지 한 대도 빠짐없이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냈다. 또한 400년 종가의 역사가 내려오면서 한 대도 빠짐없이 간찰이 남아있으며 자손들의 과거나 시험에 관련된 문서들은 문규로 정해서 모두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만취헌>
조선 시대 경북 상류주택의 생활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난고 종택은 대문채, 정침, 만취헌, 불천위사당, 별묘, 난고정 등이 400여 년 동안 시대를 달리 하며 지어졌지만 큰 변화 없이 종가의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만취헌(晩翠軒)이 눈에 들어온다. 만취헌은 난고 선생의 3대손인 만취헌 남노명(晩翠軒 南老明, 1642~1721)이 건립해 강학과 종사를 보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건물로, 4통간 대청마루 좌측에 웃방과 아랫방을 두고 있다. 원래 사랑채는 안채 영역인 ‘ㅁ’자형 정침의 오른쪽에 있었지만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사랑채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별채형 사랑채가 많아지게 되었다. 만취헌도 유교적 교리의 강화와 남성중심적인 공간이 확대되면서 별채형 사랑채를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안채 전경>
안채영역이라 할 수 있는 정침은 난고 선생의 아들인 남길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주로 영동이나 안동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뜰집 형태로 여성영역인 안채와 남성영역인 사랑채, 행랑영역이 결합된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정방형 안마당을 두어 안정감 있게 구성했다. 대문간의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헛간과 고방이 있고, 우측에는 안사랑과 사랑마루로 이뤄진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안채는 6칸의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상방을 두고 있으며, 안방 뒤에는 쌀이나 술독 등 각종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도장을 두었다. 안채와 연결된 좌익사는 정지칸과 통래칸을 두었고, 우익사는 고방 2칸과 중방을 배치했다.
<난고정>
난고정(蘭臯亭)은 난고 선생이 의병활동에서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면서 연못 위에 작은 정자를 처음 지었는데 그 후에 다시 지은 2층 누각형태의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4칸의 통간대청을 두고 좌우에 1칸 반 정도의 온돌방을 두었다.
그밖에도 별묘(別廟)와 다른 종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선생을 기리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사랑채와 남석규 선생>
수백 년 살아있는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난고 종택에는 난고 선생의 17세 종손 남석규(南錫圭, 1946년생) 선생 부부가 살고 계신다. 그동안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계셔서 자주 들어오긴 했지만 2007년 부친이 작고하시면서 대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집으로 들어왔다. 몇 십 년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만 이제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되어 두 분은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하셨다. 남석규 선생이 생활하고 계시는 만취헌 사랑방으로 안내를 하신다.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있는 온돌방, 사람 사는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남석규 선생은 새벽이면 일어나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것을 시작으로 선조들이 살던 그대로의 공간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이제 곧 명절. 친척들과 자녀들이 고향을 찾아온다. 두 분은 생활하기에 불편해도 그나마 감수하면서 생활하고 있지만 도시에서 살고있는 자녀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내려온다고 하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고 하신다. 하지만 자녀들과 손주들도 마음 푸근한 고향과 가슴 따뜻하게 안아주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그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닐 듯싶다. 아마 집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리라. 활기가 넘치는 그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