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先私後 민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
信義一貫 믿음을 갖되 끝까지 유지하라
獨立自彊 위기에 처한 민족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澹泊明志 욕심 없이 맑고 밝은 뜻을 가져라
- 인촌 선생의 좌우명 -

<부안>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1891~1955) 선생은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울산김씨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13대손으로 아버지 김경중(金暻中)과 어머니 장흥고씨(長興高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세 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명심보감》을 비롯해 《소학》, 《공자》, 《공자》 등 한학을 배우고 성리학을 익혔으며,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지만 근검과 절약을 몸에 익히며 사치를 모르고 성장했다. 어린 김성수가 생가와 양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한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기라도 하면 생모는 단호하게 꾸짖어 양가로 돌려보내거나 꼭 허락을 받아내서 오도록 했다.
1903년 13세가 되던 해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한 고정주(高鼎柱)의 딸과 결혼해 창흥의숙에서 공부하면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 모두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를 해 자리를 잡았다. 신학문을 접하게 된 인촌 선생은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배워 동포에 전수시키고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동경유학을 결심했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인촌 선생은 집안의 자금을 받아 민족의 교육계몽을 위해 1915년 유학시절 만난 동창들과 함께 사립학교인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해 학교장을 지냈다.
뿐만 아니라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를 설립했다. 1920년에는 그동안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기자들의 출입을 보고 국내 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아일보’를 설립했으며, 농촌계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국산품 애용 운동 등 민족계몽운동을 벌였다. 1926년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회를 받든 인촌 선생은 간디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식민지 하 조선 사정에 대해 자문은 구하자 간디는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고 답신을 보내왔다. 1932년에는 자금난에 빠져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는데 이 학교가 훗날 고려대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해방이후인 1947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펼쳤으며,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1년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인촌 선생은 19세기 말 한민족의 격동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정치적 격변기, 경제 근대화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나라 교육, 언론, 산업, 정치의 근대화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전북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에서 태어난 인촌 선생의 장남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 1910~1994) 선생은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하고 1949년 동아일보에 들어가 동아일보와 함께 그 일생을 보낸 천부적인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동아방송을 건립하고 한국 언론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일민 선생은 평생 부친의 좌우명인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의 신조를 몸소 가꾸고 실천하며 부친의 혼과 열정이 깃든 동아일보를 한국의 대표신문으로 키웠고, 고려대학교를 한국의 대표하는 민족사학으로 우뚝 서게 했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언론 자유 수호와 문화 발전에 헌신을 다했다.
부안 김상만 가옥(扶安 金相万 家屋, 전북 부안군 줄포면 교하길 8, 중요민속문화재 제150호)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 소년 시절을 보낸 집이자, 일민 김상만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1895년에 안채와 바깥사랑채, 문간채를 지었고, 1903년에 안사랑채와 곳간채를 추가로 지었다.

<안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살짝 휘어진 소나무 뒤로 문간채가 있다. 문간채를 들어서면 바깥사랑채와 중문채가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 잡고 있으며, 담장너머로 안사랑채가 있다.
바깥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대청과 사랑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사랑채는 인촌 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뤄져 있다. 안사랑채 오른쪽 방문 위에는 ‘인촌 선생께서 단식하시던 방’이란 푯말이 붙어있는데 이곳에서 인촌 선생은 교육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단식하던 방이다.
중문채를 통해 안채영역으로 들어서면 인촌 선생과 미산 선생의 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안채영역은 안채와 중문채, 곳간채가 ‘ㄷ’자형으로 안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방, 대청, 부엌으로 이뤄져 있다.
중문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왼쪽부터 화장실과 중문, 방,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4년에 중건한 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건물로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은 방과 대장간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방이 있다.
김상만 가옥은 현재 초가로 지붕을 잇고 있지만 원래 볏짚보다 수명이 길고 이 지방에서 흔히 구할 수 있었던 억새로 지붕을 이었다. 남부지방의 보편적인 ‘ㅡ’자형 집으로 각 건물마다 전면에 반 칸씩 퇴를 두고 마루를 깔아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하기 편리하게 지었으며, 방 옆에는 물건을 저장할 수 있는 다양한 수장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김상만 가옥을 한 바퀴 돌아보면 초가지만 기와집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넉넉한 부를 누렸지만 초가집으로 검소하게 지은 일가의 품격을 전해져 온다.
현재 김상만 가옥에는 인촌기념회에서 파견한 맹기풍 씨가 10년 넘게 이 집을 관리하고 있다.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비롯해 1년에 8천명 정도 방문객이 찾아오는 곳이라 인촌기념회에서도 관리를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좀 더 많은 정부나 지자체의 지속적인 관리와 관심이 필요해 보였다.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 모두의 관심이 함께할 때 더욱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싶다
公先私後 민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
信義一貫 믿음을 갖되 끝까지 유지하라
獨立自彊 위기에 처한 민족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澹泊明志 욕심 없이 맑고 밝은 뜻을 가져라
- 인촌 선생의 좌우명 -
<부안>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1891~1955) 선생은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울산김씨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13대손으로 아버지 김경중(金暻中)과 어머니 장흥고씨(長興高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세 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명심보감》을 비롯해 《소학》, 《공자》, 《공자》 등 한학을 배우고 성리학을 익혔으며,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지만 근검과 절약을 몸에 익히며 사치를 모르고 성장했다. 어린 김성수가 생가와 양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한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기라도 하면 생모는 단호하게 꾸짖어 양가로 돌려보내거나 꼭 허락을 받아내서 오도록 했다.
1903년 13세가 되던 해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한 고정주(高鼎柱)의 딸과 결혼해 창흥의숙에서 공부하면서 신학문을 배웠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 모두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를 해 자리를 잡았다. 신학문을 접하게 된 인촌 선생은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배워 동포에 전수시키고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동경유학을 결심했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인촌 선생은 집안의 자금을 받아 민족의 교육계몽을 위해 1915년 유학시절 만난 동창들과 함께 사립학교인 백산학교(白山學校) 설립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해 학교장을 지냈다.
뿐만 아니라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를 설립했다. 1920년에는 그동안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기자들의 출입을 보고 국내 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아일보’를 설립했으며, 농촌계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국산품 애용 운동 등 민족계몽운동을 벌였다. 1926년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회를 받든 인촌 선생은 간디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식민지 하 조선 사정에 대해 자문은 구하자 간디는 “절대적으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고 답신을 보내왔다. 1932년에는 자금난에 빠져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는데 이 학교가 훗날 고려대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해방이후인 1947년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펼쳤으며,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1년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인촌 선생은 19세기 말 한민족의 격동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정치적 격변기, 경제 근대화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나라 교육, 언론, 산업, 정치의 근대화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전북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에서 태어난 인촌 선생의 장남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 1910~1994) 선생은 일본과 영국에서 유학하고 1949년 동아일보에 들어가 동아일보와 함께 그 일생을 보낸 천부적인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동아방송을 건립하고 한국 언론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일민 선생은 평생 부친의 좌우명인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의 신조를 몸소 가꾸고 실천하며 부친의 혼과 열정이 깃든 동아일보를 한국의 대표신문으로 키웠고, 고려대학교를 한국의 대표하는 민족사학으로 우뚝 서게 했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언론 자유 수호와 문화 발전에 헌신을 다했다.
부안 김상만 가옥(扶安 金相万 家屋, 전북 부안군 줄포면 교하길 8, 중요민속문화재 제150호)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 소년 시절을 보낸 집이자, 일민 김상만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1895년에 안채와 바깥사랑채, 문간채를 지었고, 1903년에 안사랑채와 곳간채를 추가로 지었다.
<안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살짝 휘어진 소나무 뒤로 문간채가 있다. 문간채를 들어서면 바깥사랑채와 중문채가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 잡고 있으며, 담장너머로 안사랑채가 있다.
바깥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대청과 사랑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사랑채는 인촌 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뤄져 있다. 안사랑채 오른쪽 방문 위에는 ‘인촌 선생께서 단식하시던 방’이란 푯말이 붙어있는데 이곳에서 인촌 선생은 교육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단식하던 방이다.
중문채를 통해 안채영역으로 들어서면 인촌 선생과 미산 선생의 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안채영역은 안채와 중문채, 곳간채가 ‘ㄷ’자형으로 안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ㅡ’자형 건물로 왼쪽부터 방, 대청, 부엌으로 이뤄져 있다.
중문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왼쪽부터 화장실과 중문, 방,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4년에 중건한 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건물로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은 방과 대장간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방이 있다.
김상만 가옥은 현재 초가로 지붕을 잇고 있지만 원래 볏짚보다 수명이 길고 이 지방에서 흔히 구할 수 있었던 억새로 지붕을 이었다. 남부지방의 보편적인 ‘ㅡ’자형 집으로 각 건물마다 전면에 반 칸씩 퇴를 두고 마루를 깔아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하기 편리하게 지었으며, 방 옆에는 물건을 저장할 수 있는 다양한 수장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김상만 가옥을 한 바퀴 돌아보면 초가지만 기와집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넉넉한 부를 누렸지만 초가집으로 검소하게 지은 일가의 품격을 전해져 온다.
현재 김상만 가옥에는 인촌기념회에서 파견한 맹기풍 씨가 10년 넘게 이 집을 관리하고 있다.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비롯해 1년에 8천명 정도 방문객이 찾아오는 곳이라 인촌기념회에서도 관리를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좀 더 많은 정부나 지자체의 지속적인 관리와 관심이 필요해 보였다.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 모두의 관심이 함께할 때 더욱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