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헌고택 앞으로 낙동강 원류인 내성천이 흐르고 있다.
2013년 6월 영주댐이 완공되면 이 곳은 물에 잠기고 만다
요즘은 눈도 내려 도로사정도 좋지 않고 영주 봉화는 분지라서 더 춥다며 따뜻한 봄날에 찾아오라고 만류하셨지만 기어이 선생과 약속을 잡았다. 필자 역시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3일 연속되는 강추위는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까지 내렸다. 그래도 용기 내어 떠난다.
경북 영주 이산면 두월리, 마을 앞으로 낙동강 원류인 내성천이 흐르는 작고 고요한 마을 한가운데 연안 김씨 종가인 영주 괴헌 고택(槐軒 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62호)이 자리를 잡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강추위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햇살을 가득 받은 사랑채는 영하 15도의 기온과는 상관없다는 듯 환하게 빛나고 있다.

괴헌공의 7대손인 김종국(1942년생) 선생이 나오셔서 먼저 건물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신다. 잔디가 깔려있는 넒은 사랑채 앞마당에는 동선에 따라 바닥돌이 깔려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3단의 기단위에 자연석으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4.5칸인 사랑채는 사랑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사랑방과 감실방이 있는 중문채와도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집형으로 부엌과 안방 뒤로는 2칸이 더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역시 앞마당에도 바닥돌이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계단 형태로 기단위에 자리 잡은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안방과 대청이, 익사에 부엌이 딸려있고 오른쪽으로 상방과 윗방이 앞뒤로 있다. 특히 이 안채에는 '고물'이라는 비밀공간이 숨어있다. 하나는 안방천장에 있고, 또 하나는 상방 천장에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장소로 사람들의 목숨을 많이 살린 곳이기도 하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모두 옮겨놓았지만 한때는 이 집안의 유물들을 숨겨놓는 비밀창고로 쓰이기도 했다. 선생은 고물이 있는 문을 가리키며 당시 이곳에 커다란 삿갓을 걸어놓아 비밀창고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고 하신다. 사당이 있는 돌계단을 오르니 아름다운 고택의 지붕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뒤로는 높은 언덕이, 앞으로는 내성천 강물을 품은 소쿠리형 지형으로 외풍을 막아주고 낙엽 등이 모여 잘 산다는 명형국지(名形局地) 한 가운데 터를 잡고 있다. 300년이 넘는 명문가를 찾아가보면 그 선조들이 명당을 찾아 터를 잡고 집을 짓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가 보아도 이래서 명당이구나 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오니 말이다.

옛날 안동에서 영주, 봉화 내성천을 따라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는 괴헌고택은 늘 많은 손님들이 찾았다고 한다. 그 당시 태어났더라면 감히 오르지도 못했을 사랑채 사랑방으로 안내하신다. 연안 김씨 선조는 550년 전 근검절약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선비의 집안으로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괴헌고택은 1779년에 덕산공 김경집(金慶集, 1715~1794)이 이 집을 지어 조선 순조때 대과에 급제한 선생의 7대조이신 괴헌 김영(金瑩, 1789~1868)에게 살림집으로 물려주었다. 김영 선생은 집주위에 회화나무가 많아 당호를 '괴헌(槐軒)'이라 붙였다. 그 후 후손 김복연(김복연)이 일부를 중수했고, 지난 1972년에는 수해로 '월은정' 정자와 행랑채가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옛 모습이 비교적 그대로 지금까지 잘 남아 있다.
선생은 근검절약 하시며 손수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증조부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옷이라고는 외출복과 일상복 그리고 손님들을 맞이할 때 입으시던 손님접대복, 이 세벌이 전부였으며, 제례에 사용하는 유기를 제외하곤 기왓장으로는 그릇이 닳을까봐 닦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침에 먹다 남은 반찬은 모양의 변화 없이 그대로 점심상에 올라와야만 했다고 한다.
김종국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6살 때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로 올라가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과 사업을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다. 당시엔 나이 들면 양평 호숫가 언덕에 근사한 별장을 꿈꿨지 고향에 내려와 생활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여행을 하면서 백년도 안 된 벽돌집 앞 외벽을 그대로 살려서 재건축을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뭔가 머리에 와 닿았다. 그 모습은 선생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그들의 문화보다 훨씬 오래되고 뛰어나난 우리 전통문화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2004년에는 지난 250년간 연안김씨 7대에 걸쳐 내려온 퇴계 이황 선생이 어린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그림으로 설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 목판본 초판본과 고서적 1,700여점을 비롯해 대형 갓, 어사화, 관복, 가마 등 200여점과 그림 간찰 등 8,000여점 등 1만여 점의 유물들을 영주 소수서원박물관에 기증했다. 선생은 서울의 여러 박물관에서 기증을 여러 번 요청도 했지만 조상의 유물이 고향 밖으로 나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물관을 지어 보관할까도 했지만 지역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정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유물들을 관람하고 학술연구에도 유익한 자료로 사용되기를 희망했다.
영주 괴헌 고택은 이제 2013년 6월이면 영주시 평은면 문화단지로 이건을 하게 된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하나로 높이 55m의 대형 영주댐이 내성천 상류에 완공되면 서울 여의도보다 넓은 땅이 물속에 잠기게 되고 아름다운 모래톱으로 비경을 이루던 내성천도 사라지게 된다. 수몰 예정지 안에 있는 괴헌고택을 비롯해 13점의 지정문화재가 있어 모두 통째로 뜯어내 옮겨야만 한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법인데 250년 동안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연과 소통하면서 전통을 지켜온 고택이 새로운 곳을 찾아 이건해야 한다니 마음이 아려온다. 선생은 국가 발전을 위한 국적사업이기에 고향 주민들과 함께 희생을 각오하고 협조를 했지만 마음은 불편하다며 말끝을 흐리신다. 문화단지로 이건하게 되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고택이 되기를 희망하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여쭸더니 김종국 선생은 "내게 있어 아버지는 굉장히 완고한 분이셨지요"라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신다. 그리곤 환하면서도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미소로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앞마당 잔디밭을 내려다보시며 "잘못을 하면 오늘같이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도 눈 위에 맨발로 벌을 세울 정도였다"고 한다.
대문까지 나와 배웅하시는 선생의 모습은 인생을 관조한 듯 허허롭고도 여유로워보였다. 내성천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 모습 그대로 기억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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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헌고택 앞으로 낙동강 원류인 내성천이 흐르고 있다.
2013년 6월 영주댐이 완공되면 이 곳은 물에 잠기고 만다
요즘은 눈도 내려 도로사정도 좋지 않고 영주 봉화는 분지라서 더 춥다며 따뜻한 봄날에 찾아오라고 만류하셨지만 기어이 선생과 약속을 잡았다. 필자 역시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3일 연속되는 강추위는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까지 내렸다. 그래도 용기 내어 떠난다.
경북 영주 이산면 두월리, 마을 앞으로 낙동강 원류인 내성천이 흐르는 작고 고요한 마을 한가운데 연안 김씨 종가인 영주 괴헌 고택(槐軒 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62호)이 자리를 잡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강추위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햇살을 가득 받은 사랑채는 영하 15도의 기온과는 상관없다는 듯 환하게 빛나고 있다.
괴헌공의 7대손인 김종국(1942년생) 선생이 나오셔서 먼저 건물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신다. 잔디가 깔려있는 넒은 사랑채 앞마당에는 동선에 따라 바닥돌이 깔려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3단의 기단위에 자연석으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4.5칸인 사랑채는 사랑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사랑방과 감실방이 있는 중문채와도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집형으로 부엌과 안방 뒤로는 2칸이 더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역시 앞마당에도 바닥돌이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계단 형태로 기단위에 자리 잡은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안방과 대청이, 익사에 부엌이 딸려있고 오른쪽으로 상방과 윗방이 앞뒤로 있다. 특히 이 안채에는 '고물'이라는 비밀공간이 숨어있다. 하나는 안방천장에 있고, 또 하나는 상방 천장에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장소로 사람들의 목숨을 많이 살린 곳이기도 하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모두 옮겨놓았지만 한때는 이 집안의 유물들을 숨겨놓는 비밀창고로 쓰이기도 했다. 선생은 고물이 있는 문을 가리키며 당시 이곳에 커다란 삿갓을 걸어놓아 비밀창고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고 하신다. 사당이 있는 돌계단을 오르니 아름다운 고택의 지붕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뒤로는 높은 언덕이, 앞으로는 내성천 강물을 품은 소쿠리형 지형으로 외풍을 막아주고 낙엽 등이 모여 잘 산다는 명형국지(名形局地) 한 가운데 터를 잡고 있다. 300년이 넘는 명문가를 찾아가보면 그 선조들이 명당을 찾아 터를 잡고 집을 짓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 할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가 보아도 이래서 명당이구나 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오니 말이다.
옛날 안동에서 영주, 봉화 내성천을 따라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는 괴헌고택은 늘 많은 손님들이 찾았다고 한다. 그 당시 태어났더라면 감히 오르지도 못했을 사랑채 사랑방으로 안내하신다. 연안 김씨 선조는 550년 전 근검절약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선비의 집안으로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괴헌고택은 1779년에 덕산공 김경집(金慶集, 1715~1794)이 이 집을 지어 조선 순조때 대과에 급제한 선생의 7대조이신 괴헌 김영(金瑩, 1789~1868)에게 살림집으로 물려주었다. 김영 선생은 집주위에 회화나무가 많아 당호를 '괴헌(槐軒)'이라 붙였다. 그 후 후손 김복연(김복연)이 일부를 중수했고, 지난 1972년에는 수해로 '월은정' 정자와 행랑채가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옛 모습이 비교적 그대로 지금까지 잘 남아 있다.
선생은 근검절약 하시며 손수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증조부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옷이라고는 외출복과 일상복 그리고 손님들을 맞이할 때 입으시던 손님접대복, 이 세벌이 전부였으며, 제례에 사용하는 유기를 제외하곤 기왓장으로는 그릇이 닳을까봐 닦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침에 먹다 남은 반찬은 모양의 변화 없이 그대로 점심상에 올라와야만 했다고 한다.
김종국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6살 때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로 올라가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과 사업을 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다. 당시엔 나이 들면 양평 호숫가 언덕에 근사한 별장을 꿈꿨지 고향에 내려와 생활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여행을 하면서 백년도 안 된 벽돌집 앞 외벽을 그대로 살려서 재건축을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뭔가 머리에 와 닿았다. 그 모습은 선생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그들의 문화보다 훨씬 오래되고 뛰어나난 우리 전통문화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2004년에는 지난 250년간 연안김씨 7대에 걸쳐 내려온 퇴계 이황 선생이 어린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그림으로 설명한 성학십도(聖學十圖) 목판본 초판본과 고서적 1,700여점을 비롯해 대형 갓, 어사화, 관복, 가마 등 200여점과 그림 간찰 등 8,000여점 등 1만여 점의 유물들을 영주 소수서원박물관에 기증했다. 선생은 서울의 여러 박물관에서 기증을 여러 번 요청도 했지만 조상의 유물이 고향 밖으로 나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물관을 지어 보관할까도 했지만 지역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정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유물들을 관람하고 학술연구에도 유익한 자료로 사용되기를 희망했다.
영주 괴헌 고택은 이제 2013년 6월이면 영주시 평은면 문화단지로 이건을 하게 된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하나로 높이 55m의 대형 영주댐이 내성천 상류에 완공되면 서울 여의도보다 넓은 땅이 물속에 잠기게 되고 아름다운 모래톱으로 비경을 이루던 내성천도 사라지게 된다. 수몰 예정지 안에 있는 괴헌고택을 비롯해 13점의 지정문화재가 있어 모두 통째로 뜯어내 옮겨야만 한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법인데 250년 동안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연과 소통하면서 전통을 지켜온 고택이 새로운 곳을 찾아 이건해야 한다니 마음이 아려온다. 선생은 국가 발전을 위한 국적사업이기에 고향 주민들과 함께 희생을 각오하고 협조를 했지만 마음은 불편하다며 말끝을 흐리신다. 문화단지로 이건하게 되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고택이 되기를 희망하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여쭸더니 김종국 선생은 "내게 있어 아버지는 굉장히 완고한 분이셨지요"라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신다. 그리곤 환하면서도 그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미소로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앞마당 잔디밭을 내려다보시며 "잘못을 하면 오늘같이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도 눈 위에 맨발로 벌을 세울 정도였다"고 한다.
대문까지 나와 배웅하시는 선생의 모습은 인생을 관조한 듯 허허롭고도 여유로워보였다. 내성천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 모습 그대로 기억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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