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장흥 존재 고택 (存齋 古宅)




동백꽃 떨어져 푸른 잔디를 덮자 山茶花落綠莎

금모래 위 게으른 걸음으로 명승지 찾았네 懶步金沙選勝遊

한 곡조 뱃노래에 강 위 해가 저물자 一曲漁歌江日晩

사람들 홀연히 동정루에 오르네 忽然人上洞庭樓

'만덕사' - 위백규 지음

 

 억새와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뤄 한 폭의 그림을 그려놓은 듯 산세가 아름다운 천관산 아래 방촌마을. 600여 년 동안 장흥 위씨가 살아온 집성촌이 여기에 있다. 장흥군 관산읍에서 방촌으로 넘어오는 작은 고갯마루에는 남장승인 진서대장군과 여장승 미륵불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있다. 언제 세워졌는지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마을의 역사와 함께하며 방촌마을을 지키고 있다.

 

  방촌(傍村)마을 안쪽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장흥 존재 고택(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61호).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학문을 꽃피운 호남 실학의 대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존재 선생은 진사를 지낸 영이재(詠而齋) 위덕문의 아들로 태어나 6세에 국문을 해독하고, 10세에는 천문, 지리, 병서,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했다. 25세 때 스승인 병계 선생을 만나면서 존재 선생은 학문의 깊이가 더해지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03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리서라 할 수 있는《환영지》를 내놓았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41세가 되면서부터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에 몰입하면서 《존재집》을 비롯해 9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존재 선생의 높은 학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지방 관리들의 천거로 69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이 열린다. 옥과현감으로 제수된 존재 선생은 자신이 쓴《정현신보》를 바탕으로 임금에게 정치와 경제에 관한 견해를 밝힌 '만언봉사'를 써서 올린다. 이에 감복한 정조가 장원서 별제라는 정6품 벼슬을 내리지만 노환으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존재 선생은 한양에서 천리나 떨어진 외딴 바닷가 마을, 장흥 땅에서 당대 쟁쟁했던 학자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의 학문의 계보를 잇는 병계 윤봉구의 제자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실학'이라는 학풍을 열었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이라는 명성 높은 실학자의 그늘에 가려져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한 채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했던 학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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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현>

<존재 선생의 8대손 위재현 선생>

 

  흩날리는 눈이 찾아온 봄을 시샘하고 있지만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보리밭은 계절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방촌마을의 예스러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이끼 낀 돌담과 바위들도 이미 봄기운을 머금고 있다. 이번 여행길은 운 좋게도 존재 선생의 8대손인 위재현 선생(58세)과 출발부터 동행하는 행운을 누렸다.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존재 고택 마당을 들어서니 뒷산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삼은 높은 안채와 서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집은 170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상량문에 따르면 안채는 1937년에 지었고, 위재현 선생의 12대조인 고조가 지은 집을 8대조인 존재 선생이 1775년에 개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막돌로 쌓은 이중기단위에 높이 올려 앉힌 안채는 5칸 겹집으로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안방이 있고 부엌과 광이 앞뒤로 위치해 있으며, 오른쪽에 온돌방이 앞뒤로 있다. 안방 앞에서부터 대청을 지나 온돌방까지 길게 툇마루가 나 있다. 대청마루에 앞뒤로 난 문을 활짝 열면 앞으로는 저 멀리 천관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뒤로는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운치 있게 꾸며진 정원을 내다볼 수 있다. '詠而齋'와 '存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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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고>

<서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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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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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호인 '영이재'와 존재 선생의 호 '존재'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서재는 18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존재 선생의 선비정신이 오롯이 남아있다. 서재는 단칸짜리 건물로 아주 작고 특이한 구조로 지어졌다. 지붕의 한쪽은 팔작지붕이고, 안채와 접하는 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서재는 앞쪽에 대청과 방을 두고 앞마당을 등진 방향으로 툇마루가 있다. 글공부에 지칠 때쯤 존재 선생은 어쩌면 이 대청에 기대어 대문 밖 연못에 눈길을 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석가산을 만들어 대나무를 심어놓은 연못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존재 선생이 글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때 연못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가 방해를 하자 주문을 걸었다. 그 후 이 연못에서는 지금까지도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사당은 정원에 있는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조금 높은 곳에 있다. 지면에서 떨어져 올려지은 사당은 빗물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풍판에 특이하게도 물결이 치는 것 같이 곡선을 주었다.

 

 2남 7녀, 9남매의 장남인 위재현 선생. 어머니 백남자 여사는 위로 딸만 줄줄이 5명은 낳은 후 6번째로 위재현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이젠 웃으면서 어머니께 "제가 아들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효도를 했습니다"라 말씀드릴 수 있지만 줄줄이 딸만 다섯 명 낳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짐작된다고 한다. 이 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장흥에서 살았다. 남들 보기에 남부럽지 않은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가난했던 실학자 집안의 장남으로, 농사일을 도우며 힘들게 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부모님은 장손은 집안을 지켜야 한다며 도시로 나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만류하시며 고향에 머물기를 권유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은 장흥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며 자리를 잡게 되어 지금까지 고향에는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20여 년 전 아버지의 병환으로 두 분 모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 집은 언젠가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며 덩그러니 외로움을 간직한 채 혼자 남아있다. 요즘 선생은 두 달에 한번 정도 장흥 고향집에 내려와 이곳저곳을 돌보기도하고, 친구들과 함께 내려와 머물기도 한다. 새벽이면 뒤뜰 대나무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이 깨어나고 도시에서 느끼지 못하는 상쾌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고택에서 어린 시절엔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이 묻어나고, 이런 집을 남겨주신 조상님께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관산읍 방촌마을은 2005년 존재 위백규 선생의 유물과 방촌마을의 유물을 보존 관리하기 위해 ‘방촌유물전시관’을 설립했다. 존재 선생의 전시공간을 마련해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던 유물을 이곳에 옮겨 전시하고 있지만 존재 선생의 후손들에겐 한마디 상의조차 없었던 지자체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나 살았던 후손들의 기억이나 자문을 받아야하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건물을 보수하고, 기존 문화재와 어울리지 않는 시설물을 설치해 미관을 해치고 있다. 이제 몇 년 후 선생은 이곳에 내려와 머물 예정이다. 스르륵 스르륵 서로 의지하며 부딪치는 대나무 숲이 전해주는 노래를 벗 삼고 천관산 기암괴석마다 전해지는 전설을 얘기하리라. 《지제지》를 통해 존재 선생이 천관산에 있는 봉우리와 골짜기, 바위들에 명명한 것을 찾아 산행하는 쏠쏠한 즐거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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