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
- 도연명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의 한 구절 -

<구례>
<사랑채 전경>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 쪽으로 달리다보면 깨끗하고 푸른 섬진강을 끼고 기름진 넓은 들판 아늑한 곳,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마을 한가운데 구례 운조루(雲鳥樓,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가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3대 명당지인 이곳은 금환락지(金環落地)로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으로 주택지로는 최상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조선 영조 52년(1776) 운조루를 건립한 무관 류이주(柳爾胄, 1726~1797)는 문화류씨 곤산군파 30대 영삼(1675~1735)과 영천최씨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개와 힘이 장사에서 호랑이도 채찍으로 내리쳐서 쫓아버릴 정도로 대담했던 류이주는 28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가 마흔 두 살이 되던 1767년에는 수어청 파총 성기별장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기도하고, 마흔 여섯(1771년)에는 낙안군수가 되었다. 하지만 영조 말엽 사색당쟁에 휘말린 류이주는 유배되었다가 1774년 가족들과 함께 구례 토지면 구룡정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776년 금환락지의 중심인 이곳에 집터를 잡고 운조루를 짓기 시작했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1776년)에 오르면서 다시 벼슬길에 오른 류이주는 함흥 오위장이 되어 함흥성을 쌓는데 그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7년에 걸친 집 공사는 1982년 용천부사로 있을 무렵 완성했다. 류이주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지명을 따서 ‘귀만와(歸晩窩)’라 부르다가 ‘운조루(雲鳥樓)’라 불렀다. ‘운조루’는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글귀로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으로 자신의 둥지를 찾고 싶은 류이주의 염원이 담겨 있다.
커다란 연못을 지나면 커다란 솟을 대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만든다. 높은 솟을 대문 홍살문 아래 지금은 말머리 뼈가 대신하고 있지만 그 예전에는 호랑이 뼈를 매달아 놓았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 뒤로 ‘ㄱ'자형 사랑채가 높은 기단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북쪽으로 2칸이 나와 있으며, 왼쪽부터 누마루, 대청, 사랑방, 대청 북쪽으로 책방과 제실이 있다. 주변 풍경이 한눈이 들어오도록 삼면이 확 트인 누마루는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그 당당함을 돋보이게 했다. 작은 사랑채는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위치한 3칸 반으로 헛간, 골방, 작은사랑방이 있으며 앞면에 툇마루가 붙어있다.

<구례>
<멀리 지리산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운조루 전경>
여성의 공간인 안채는 사랑채 사이에 있는 안중간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 안방과 부엌, 찬광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2개의 건넌방과 아궁이부엌, 광이 있으며, 작은 사랑채와 연결된 곳간채를 마주하고 있다. 왼쪽에 있는 넓은 부엌을 들어서면 큰사랑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곳에 부엌일을 할 수 있는 우물이 있는 부엌마당을 두어 여인네들이 쉽게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여인네들에 대한 배려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안채에는 다른 가옥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2층 구조로 된 비밀의 방이 숨어있다. 조선 시대 남녀유별이 심했던 시절,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았던 여인네들을 배려해 몰래 사랑마당을 오가는 남성이나 바깥을 훔쳐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문 밖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연못을 만들고 한쪽에 원형의 섬을 놓아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했다. 행랑채는 운조루의 정면 담장을 대신하여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19칸이 일직선으로 길게 서 있다. 류이주가 건축할 그 당시에는 행랑채는 청직이방, 아궁이 부엌, 행랑방, 곳간 등 좌우로 각각 12칸식 24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행랑채 왼쪽 끝에는 가빈터, 집안 내에 죽은 사람을 잠시 모셔 두었던 곳이 있다. 사당은 안채와 구분되는 담장을 쌓고 그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남도의 대표적인 적선가로 손꼽히는 구례 운조루는 항상 관광객은 물론이요, 답사를 온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운조루 대문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씌어있는 뒤주를 가장 먼저 찾게 된다.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가져갈 수 있도록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헛간에 놓아두었다. 쌀이 세 가마니가 들어가는 200여년 된 원통형 뒤주에는 마을의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항상 개방되어 있게 한 류이주의 나눔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운조루에서 또 하나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굴뚝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굴뚝을 따로 두지 않고 전면 기단에서 연기가 배출되도록 설계를 했다. 굴뚝은 아궁이 반대편에 높게 설치해야만 연기가 술술 잘 빠지지만 운조루는 마당으로 연기가 낮게 퍼지도록 설계를 해 어렵고 가난한 이웃에게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는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사대부가의 배려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구례는 동학,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그 힘든 시간을 지나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며 상생했기 때문이다.

<타인능>
<'타인능해'라고 쓰여진 뒤주>
문화유씨 10대 종손인 류홍수(柳鴻洙, 1954년생) 선생은 벌써부터 대문 앞을 서성이며 필자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구례로 향하는 길은 꽃구경을 나선 차량으로 길게 줄을 선 탓도 있었지만 섬진강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터널의 환상적인 풍경에 취해 버렸다. 선생과 함께 운조루를 한 바퀴 돌아보며 안채 대청마루에도, 사랑채 누마루에도 오르는 일반인을 하기 힘든 특권을 누렸다. 사랑채 앞에 통째로 뚝뚝 떨어진 붉은 동백이며, 울긋불긋 피어나기 시작한 봄꽃들, 푸르름을 머금기 시작한 아름다운 오미리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선생은 감탄하는 모습이 재미있으신지 그저 웃고만 계신다.
선생은 사랑채 뒤에 있었던 별당채가 복원이 되고, 이제 곧 착공하게 될 유물전시관이 빨리 완성되길 기대하셨다. 5년 전 처음 어색한 발걸음으로 솟을대문을 들어섰을 때 어수선한 그 모습도 사라지고 방문할때마다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고택은 우리 과거 속에 머물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 삶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서고 있다. 그 옛날 영화롭던 시간으로 되돌릴 수도 없고 손님맞이로 주인의 손길이 분주해지겠지만 고택의 창호지 너머로 두런두런 사람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
- 도연명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의 한 구절 -
<구례>
<사랑채 전경>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 쪽으로 달리다보면 깨끗하고 푸른 섬진강을 끼고 기름진 넓은 들판 아늑한 곳,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마을 한가운데 구례 운조루(雲鳥樓,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가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3대 명당지인 이곳은 금환락지(金環落地)로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으로 주택지로는 최상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조선 영조 52년(1776) 운조루를 건립한 무관 류이주(柳爾胄, 1726~1797)는 문화류씨 곤산군파 30대 영삼(1675~1735)과 영천최씨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개와 힘이 장사에서 호랑이도 채찍으로 내리쳐서 쫓아버릴 정도로 대담했던 류이주는 28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가 마흔 두 살이 되던 1767년에는 수어청 파총 성기별장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기도하고, 마흔 여섯(1771년)에는 낙안군수가 되었다. 하지만 영조 말엽 사색당쟁에 휘말린 류이주는 유배되었다가 1774년 가족들과 함께 구례 토지면 구룡정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776년 금환락지의 중심인 이곳에 집터를 잡고 운조루를 짓기 시작했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1776년)에 오르면서 다시 벼슬길에 오른 류이주는 함흥 오위장이 되어 함흥성을 쌓는데 그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7년에 걸친 집 공사는 1982년 용천부사로 있을 무렵 완성했다. 류이주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지명을 따서 ‘귀만와(歸晩窩)’라 부르다가 ‘운조루(雲鳥樓)’라 불렀다. ‘운조루’는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글귀로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으로 자신의 둥지를 찾고 싶은 류이주의 염원이 담겨 있다.
커다란 연못을 지나면 커다란 솟을 대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만든다. 높은 솟을 대문 홍살문 아래 지금은 말머리 뼈가 대신하고 있지만 그 예전에는 호랑이 뼈를 매달아 놓았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 뒤로 ‘ㄱ'자형 사랑채가 높은 기단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북쪽으로 2칸이 나와 있으며, 왼쪽부터 누마루, 대청, 사랑방, 대청 북쪽으로 책방과 제실이 있다. 주변 풍경이 한눈이 들어오도록 삼면이 확 트인 누마루는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그 당당함을 돋보이게 했다. 작은 사랑채는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위치한 3칸 반으로 헛간, 골방, 작은사랑방이 있으며 앞면에 툇마루가 붙어있다.
<구례>
<멀리 지리산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운조루 전경>
여성의 공간인 안채는 사랑채 사이에 있는 안중간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 안방과 부엌, 찬광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2개의 건넌방과 아궁이부엌, 광이 있으며, 작은 사랑채와 연결된 곳간채를 마주하고 있다. 왼쪽에 있는 넓은 부엌을 들어서면 큰사랑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곳에 부엌일을 할 수 있는 우물이 있는 부엌마당을 두어 여인네들이 쉽게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여인네들에 대한 배려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안채에는 다른 가옥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2층 구조로 된 비밀의 방이 숨어있다. 조선 시대 남녀유별이 심했던 시절,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았던 여인네들을 배려해 몰래 사랑마당을 오가는 남성이나 바깥을 훔쳐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문 밖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연못을 만들고 한쪽에 원형의 섬을 놓아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했다. 행랑채는 운조루의 정면 담장을 대신하여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19칸이 일직선으로 길게 서 있다. 류이주가 건축할 그 당시에는 행랑채는 청직이방, 아궁이 부엌, 행랑방, 곳간 등 좌우로 각각 12칸식 24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특히 행랑채 왼쪽 끝에는 가빈터, 집안 내에 죽은 사람을 잠시 모셔 두었던 곳이 있다. 사당은 안채와 구분되는 담장을 쌓고 그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남도의 대표적인 적선가로 손꼽히는 구례 운조루는 항상 관광객은 물론이요, 답사를 온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운조루 대문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씌어있는 뒤주를 가장 먼저 찾게 된다.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가져갈 수 있도록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헛간에 놓아두었다. 쌀이 세 가마니가 들어가는 200여년 된 원통형 뒤주에는 마을의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항상 개방되어 있게 한 류이주의 나눔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운조루에서 또 하나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굴뚝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굴뚝을 따로 두지 않고 전면 기단에서 연기가 배출되도록 설계를 했다. 굴뚝은 아궁이 반대편에 높게 설치해야만 연기가 술술 잘 빠지지만 운조루는 마당으로 연기가 낮게 퍼지도록 설계를 해 어렵고 가난한 이웃에게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는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사대부가의 배려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구례는 동학,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 그 힘든 시간을 지나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며 상생했기 때문이다.
<타인능>
<'타인능해'라고 쓰여진 뒤주>
문화유씨 10대 종손인 류홍수(柳鴻洙, 1954년생) 선생은 벌써부터 대문 앞을 서성이며 필자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구례로 향하는 길은 꽃구경을 나선 차량으로 길게 줄을 선 탓도 있었지만 섬진강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터널의 환상적인 풍경에 취해 버렸다. 선생과 함께 운조루를 한 바퀴 돌아보며 안채 대청마루에도, 사랑채 누마루에도 오르는 일반인을 하기 힘든 특권을 누렸다. 사랑채 앞에 통째로 뚝뚝 떨어진 붉은 동백이며, 울긋불긋 피어나기 시작한 봄꽃들, 푸르름을 머금기 시작한 아름다운 오미리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선생은 감탄하는 모습이 재미있으신지 그저 웃고만 계신다.
선생은 사랑채 뒤에 있었던 별당채가 복원이 되고, 이제 곧 착공하게 될 유물전시관이 빨리 완성되길 기대하셨다. 5년 전 처음 어색한 발걸음으로 솟을대문을 들어섰을 때 어수선한 그 모습도 사라지고 방문할때마다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고택은 우리 과거 속에 머물고 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 삶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서고 있다. 그 옛날 영화롭던 시간으로 되돌릴 수도 없고 손님맞이로 주인의 손길이 분주해지겠지만 고택의 창호지 너머로 두런두런 사람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