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공예 전통의 맥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김철주

금속제 그릇이나 물건의 표면에 평각(平刻)·투각(透刻)·고각(高刻)·육각(肉刻)·상감(象嵌) 등 무늬를 새겨 넣어 장식하는 조각장. ‘조이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조각장은 작은 정으로 금이나 은 등 금속의 표면을 파내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드는 장인이다. 금속공예는 청동기시대 이후 우리나라 의장 기술의 중심을 이루어 온 대표적인 기술로서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이 지금은 수요가 적고, 사회적 인지도도 낮아 맥이 끊길 위험에 처해 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무형문화재전수회관 내 작업장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김철주 선생을 찾아뵈었다.

김철주 선생은 1933년 서울에서 당대 최고의 조각장이었던 김정섭 옹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셨던 김정섭 옹은 대한제국 당시에 서울 광교천변에 군집해 있던 은방도가(銀房都家)의 기술을 그대로 이은 장인이었다. 조각장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조이질을 배운 선생은 보석상을 경영하며, 가내수공업으로 금은세공과 함께 조각을 해오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선친의 기술을 이수하기 시작했다. 부친이 작고한 이후에도 선생은 작업대 옆에 늘 부친의 족자를 걸어놓고 힘들 때마다 쳐다보며 마음을 다스린다.
“조각이란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면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집중합니다. 잡념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일을 놓고 잡념이 전부 사라져서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다시 조각을 시작하죠. 요즘은 몸이 좋지 않아 작업을 하지 않고 있어요”
선생은 한 작품을 만드는데 보통 6개월에서 3년까지도 걸린다. 워낙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다 보니 잡념이 들면 손을 놓아 버리는 까닭이다. 고승이 도를 닦는 과정과 같다. 선생은 잡념이 들고 용기를 잃을 때 마다 선생의 작업장 책상 위에 있는 부친 김정섭 옹의 족자를 들여다본다.

사회적인 인식도 낮고, 부를 이루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가업과 전통을 잇는다’는 일념으로 조이질을 시작한 선생은 지금까지 40여년의 세월동안 외길을 걸어왔다. 묵묵히 이 일만을 고집해온 선생은 공방에서 작업하는 것 외에 80년대에는 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 공예과에서 조각기법 실기 기술을 강의하는 등 여러 대학에서 금속조각 기법을 강의하며 이 일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선생은 2007년 나이 일흔이 훌쩍 넘어서야 생애 첫 전시회 ‘금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이질’를 열었다. 자신의 작품 외에 부친 김정섭 옹의 작품, 부친과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까지 함께 전시돼 ‘대를 잇는 조각장 부자전’이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부친 김정섭 옹이 살아 계실 때 30년 동안이나 전시회를 해드린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가장 마음이 걸렸다는 선생은 전시회 동안 돌아가신 부친의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한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죠 뭐”
현재 조이질을 배우려 하는 사람이 없어 선생이 걱정이 많다. 하지만, 생계가 우선이니 하라고 강요할 수조차 없다 한다. 선생의 환한 웃음 뒤에 씁쓸함이 보이는 건 필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금속공예 전통의 맥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김철주
금속제 그릇이나 물건의 표면에 평각(平刻)·투각(透刻)·고각(高刻)·육각(肉刻)·상감(象嵌) 등 무늬를 새겨 넣어 장식하는 조각장. ‘조이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조각장은 작은 정으로 금이나 은 등 금속의 표면을 파내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드는 장인이다. 금속공예는 청동기시대 이후 우리나라 의장 기술의 중심을 이루어 온 대표적인 기술로서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이 지금은 수요가 적고, 사회적 인지도도 낮아 맥이 끊길 위험에 처해 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무형문화재전수회관 내 작업장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 김철주 선생을 찾아뵈었다.
김철주 선생은 1933년 서울에서 당대 최고의 조각장이었던 김정섭 옹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셨던 김정섭 옹은 대한제국 당시에 서울 광교천변에 군집해 있던 은방도가(銀房都家)의 기술을 그대로 이은 장인이었다. 조각장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조이질을 배운 선생은 보석상을 경영하며, 가내수공업으로 금은세공과 함께 조각을 해오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선친의 기술을 이수하기 시작했다. 부친이 작고한 이후에도 선생은 작업대 옆에 늘 부친의 족자를 걸어놓고 힘들 때마다 쳐다보며 마음을 다스린다.
“조각이란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면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집중합니다. 잡념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일을 놓고 잡념이 전부 사라져서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다시 조각을 시작하죠. 요즘은 몸이 좋지 않아 작업을 하지 않고 있어요”
선생은 한 작품을 만드는데 보통 6개월에서 3년까지도 걸린다. 워낙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다 보니 잡념이 들면 손을 놓아 버리는 까닭이다. 고승이 도를 닦는 과정과 같다. 선생은 잡념이 들고 용기를 잃을 때 마다 선생의 작업장 책상 위에 있는 부친 김정섭 옹의 족자를 들여다본다.
사회적인 인식도 낮고, 부를 이루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가업과 전통을 잇는다’는 일념으로 조이질을 시작한 선생은 지금까지 40여년의 세월동안 외길을 걸어왔다. 묵묵히 이 일만을 고집해온 선생은 공방에서 작업하는 것 외에 80년대에는 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전신인 서라벌예술대학 공예과에서 조각기법 실기 기술을 강의하는 등 여러 대학에서 금속조각 기법을 강의하며 이 일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선생은 2007년 나이 일흔이 훌쩍 넘어서야 생애 첫 전시회 ‘금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조이질’를 열었다. 자신의 작품 외에 부친 김정섭 옹의 작품, 부친과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까지 함께 전시돼 ‘대를 잇는 조각장 부자전’이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부친 김정섭 옹이 살아 계실 때 30년 동안이나 전시회를 해드린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가장 마음이 걸렸다는 선생은 전시회 동안 돌아가신 부친의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한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죠 뭐”
현재 조이질을 배우려 하는 사람이 없어 선생이 걱정이 많다. 하지만, 생계가 우선이니 하라고 강요할 수조차 없다 한다. 선생의 환한 웃음 뒤에 씁쓸함이 보이는 건 필자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