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이천 어재연 장군 생가 (魚在淵 將軍 生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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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수비에 큰 공을 세운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이 태어난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다. 서울을 조금 벗어난 길, 차창 밖은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하다.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리 돌원마을을 들어서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먼서 인사를 건넨다. 팔성산 아래 조그만 동산을 뒤로하고 초가집은 건너편 마을을 바라보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장군의 집’이란 걸 알려주는 듯 수자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집을 알려면 그 집에 살던 사람을 먼저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시대와 일대기 등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찾아가기 전 역사책부터 펼친다. 그가 장렬하게 전사한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이야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1871년 고종 8년 6월 11일, 강화도 광성보(廣城堡). 진중 군사들의 표정은 어두웠으나 결연했다. 곧 쳐들어올 오랑캐들과의 싸움에 승산은 전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더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5년 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영예로운 승전보를 알렸던 이곳에서 죽기로 싸울 뿐이다. 고향에서 아우 재순도 달려오지 않았는가. 가문을 이어야 할 군사들을 쫓아내듯 내보낸 뒤 포좌를 순시하며 마지막 눈빛을 나누는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의 꽉 다문 입가엔 무거운 미소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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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 뜰에 세우던 대장의 군기인 '수자기'> 

 

 이렇게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나라에서는 이미 병인양요 때 큰 업적을 쌓은 어재연에게 진무중군을 제수하고 600여 명의 군사를 주어 광성진을 수비토록 한다. 미군이 해상과 육상 두 곳에서 함포와 야포로 중무장하고 총공세를 취하며 진격해 오자 어재연 장군은 수자기(帥字旗·진중 뜰에 세우던 대장의 군기)를 단 후 끝까지 목숨을 다해 응전한다. 총알을 막기 위해 갑옷 속에 일곱 겹 솜옷을 껴입고 분전했으나 중과부적. 어재연 장군은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지며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한다. 신미양요 최대의 격전인 이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에 그쳤지만, 화력에서 열세였던 어재연 장군 휘하 수비 군사들은 전사자가 350명, 부상자가 20명에 달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당시 각종 화기와 서적 등과 함께 약탈당했던 장군의 수자기는 136년 만인 지난 2007년 한국에 돌아와 박물관마다 순회 전시하고 있으며, 현재는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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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장군 생가를 들르기에 앞서 장군의 후손인 어열 선생께 연락을 드려 동행을 청했다. 어재연 장군이 5대조 할아버지가 된다는 어열 선생은 기자의 청에 흔쾌히 동행을 허락한다. 기자가 선생께 동행을 청한 이유는 지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생가를 혼자 찾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고, 그곳에 직접 살았던 사람의 향기를 느끼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어열 선생을 비롯한 6남매는 이 집에서 선생이 7살 때까지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단다. 여기서 생활하고 있진 않지만, 형제들은 한 달에 한두 번 돌아가면서 고향 집을 찾아 돌본다. 선생은 은퇴하게 되면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가꾸며 살 거란다. 지금도 조금씩 준비를 하는 듯. 선생은 이것저것 챙기더니 기자 혼자 마음껏 둘러보라며 자리를 비켜 준다.

 

 조선 시대 양반집이라고 하면 우리는 의례 기와집을 생각하고 그 부속 건물로 한두 채의 초가집을 상상하게 되지만 어재연 장군 생가(魚在淵將軍生家, 중요민속문화재 제127호)는 안채와 사랑채, 광채 등 초가가 ‘?’ 자로 넓고 시원스레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진각 초가지붕으로 된 사랑채는 2단 정도 높이의 기단을 설치하고 6칸 반 정도 크기의 ‘?’ 자로 앉아 있다. 기와집이 아닌데도 처마 끝은 마치 부연을 덧대어 지붕 선을 길게 늘인 것처럼 기둥을 대청 끝보다도 훨씬 앞으로 내밀어서 세워 차양처럼 햇빛을 막아주고 있다.

 

사랑채 오른쪽에 있는 대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서면 자연스레 몸을 돌리게 되어 있다. 안채 건물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광채에 연결된 내외담이 있다. 안주인과 방문객에 대한 배려. 우리 전통 한옥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방문객은 잠시 여유를 가지고 옷매무시를 고칠 수 있고, 안주인 역시 낮은 담장 너머로 어떤 손님이 오셨는지 미리 알 수가 있다. 안채에는 비교적 너른 안마당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중부 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모두 7칸이며 부엌과 안방, 대청과 건넌방이 ‘ㄱ’ 자 형태로 배치돼 있다. 안방 뒷벽에는 헛기둥을 세워서 반침을 달아냈고 대청의 위 칸에는 뒷벽에 덧대어서 벽장을 만들어 놓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활에 편리하도록 수납을 위한 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다. 광채는 우진각 초가지붕으로 8칸의 ‘?’ 자형의 양통집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넓은 광과 고방, 부엌, 방 그리고 대문간으로 구성돼 있다. 그 밖에 부속 건물로 안채 왼쪽에 측간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담장이 후원을 둘러싸고 있다.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 어재연 장군 생가 앞에 보이는 마을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어열 선생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선생은 그새 생가 뒤편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아직 선뜻 내려와서 살겠다는 형제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 관리도 안 되고,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도 죄송합니다.”라며 말끝을 흐린다.

 

 어재연 장군 생가는 이천시청 담당 공무원이 관심을 두기 시작한 2004년 이전까지는 폐허이다시피 했고, 먼 친척뻘 되는 이가 집을 관리한다고 여기에 살았으나 이곳저곳 많이 고치고 손을 본 바람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못내 죄송스러웠지만, 선생도 외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집에 자주 들르지 못했고. 그러던 차에 사단법인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이하 (사)고택협)를 알게 되었고, 작년에 (사)고택협에서 파견한 기동보수반이 내려와 훼손된 문짝들도 고쳐주고 관리 인력도 파견해 주어 생가를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생가가 국가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늘 비어 있다 보니 자연 관리가 소홀해져 쓰레기가 방치돼 있거나 화장실이나 생활하수처리시설들이 미비한 점 등 문화재 관리 인력 파견과 더불어 주변 환경도 함께 정비하고 관리해 주었으면 한다며 문화재청과 지자체의 담당공무원들에게 덧붙이는 당부 말씀도 잊지 않는다.

 

 선생은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사랑채 앞마당에서 이런저런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한다. “저기 보이는 저곳에 승마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수목원을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어재연 장군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된 탓에 주변이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 마을 주민에게 항상 죄송하다며, 마을 주민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을 할 계획이라 한다. 지금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어열 선생을 만나고 오는 길은 내 기분마저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더욱 빛나는 우리 고택들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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