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달성 삼가헌 (達城 三可軒)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의 국가도 고루 다스릴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능히 할 수가 없다.” - 中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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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미수가 쓴 현판>

 


 조선 시대 세종과 문종 때의 집현전 학자로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맞서 자살까지 시도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취금헌 박팽년(1417~1456, 醉琴軒 朴彭年). 달성 삼가헌(중요민속자료 104호) 대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한 편의 소설 같은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 계유정난 이후에도 박팽년은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벌이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의 학식과 재주를 사랑한 세조가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 주겠다며 회유했지만, 박팽년은 끝까지 세조를 ‘상감’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더욱 격노하게 되고, 결국 심한 고문을 당한 박팽년은 옥중에서 죽음에 이르고 다른 가담자들도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다. 또한, 박팽년의 부친은 물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3형제가 모두 처형되고, 모친, 처, 제수, 며느리들은 모두 공신들의 노비나 관비가 되어 끌려가고 만다.
 그때 친정 가까이인 대구로 관비가 되어 내려온 임신 중이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에게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노비로 만들라는 어명이 떨어진다. 해산해 보니 아들이었다. 때마침 딸을 낳은 여종과 짜고 서로 아이를 맞바꾸어 아들의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외할아버지에 의해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는 훗날 성종 대에 이르러 사육신에 대한 평가가 옳은 일을 했다는 사회적 분위기로 바뀌자 관찰사로 부임한 이모부의 권유로 자수하게 된다.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돌아온 이 아이가 바로 사육신 여섯 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朴一珊)이다. 박일산은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순천박씨 입향조가 되어 터를 잡고 정착을 하게 된다.

 

 연말의 들뜬 기분을 잠시 뒤로 하고 휴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30년 만에 찾아왔다는 강추위가 서울을 꽁꽁 얼어붙게 하였지만, 이 떠남의 열정 앞에선 강추위도 힘없이 녹아내린다. 작년 봄 삼가헌 안채에 불이 나서 급하게 달려 내려왔던 기억을 더듬으며 궁금함 반, 설렘 반, 마음이 먼저 저만치 앞서 간다.

 
 달성 삼가헌은 낙동강이 흐르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여기도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듯 여기저기 흙더미가 높이 쌓여 있다. 온 국토가 몸살을 앓고 있음을 또다시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약속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음에도 휴일 아침의 방문에 대한 미안함으로 선뜻 도착을 알리지 못하고 먼저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마을 앞을 지나는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면 멀리 넓게 펼쳐져 흐르는 강줄기가 희미하게 눈으로 들어온다. 260여 년 전 박팽년의 11대손 박성수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을 당시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본다.


삼가헌은 1747년 박성수가 순천박씨 세거지인 묘동에서 분가하여 초가를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호를 따서 ‘삼가헌’이라는 택호를 붙였다.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별당채, 연못 등 100여 년 3대에 걸쳐 완성된 삼가헌은 박성수의 아들 박광석이 1826년 사랑채를 짓고, 1874년에는 박성수의 손자 박규현이 할아버지가 삼가헌을 짓기 위해서 흙이 필요해 팠던 곳을 연당으로 만들고 정원을 꾸민 파산서당(巴山書堂)을 별당채인 하엽정(荷葉亭)으로 개축하게 된다.

 

 이 집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는 탱자나무에 눈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대문으로 들어선다. 반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사랑채가 한눈에 들어오고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이 정겹게 느껴진다. 대청마루에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悌忠信)’이라 걸린 현판이 미수 허목(眉? 許穆)이 썼다기에 다시 한 번 한 자 한 자 눈으로 읽어본다. 오른쪽 대들보 위에 높이 걸린 ‘三可軒’이라는 당호. 『삼가헌기(三可軒記)』에 보면 ‘삼가(三可’)란 ‘천하와 국가를 가히 고르게 할 수 있고, 벼슬과 녹봉도 가히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도 가히 밟을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인기척을 듣고 고택에 살고 계시는 박성수의 8대손인 박도덕(62세) 선생이 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선생은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살다가 30여 년 전 결혼과 동시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다. 잠시 자녀교육 때문에 도시로 나가기도 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선생은 요즘 젊은 세대들이 고향을 지키지 않고 편리한 도시생활을 하려 한다고 섭섭하게 생각하기 전에 ‘우리 집’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어릴 때부터 고택에서 살게 하면서 스스로 우리 한옥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초가로 지어진 중문채를 지나야 한다. 안채는 좁은 안마당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사랑채보다 더 높이 올려서 지었다. 사랑채 뒷모습을 보면서 자리 잡은 안채는 작년 봄 전기 누전으로 인해 불이 난 후 새로 단장했단다. 선생은 달성 삼가헌이 문화재로 지정된 배경을 잠시 설명하신다. 이곳 삼가헌의 별당채 하엽정(荷葉亭)과 연못이 일본잡지에 아름다운 정원으로 소개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자 문화재청에서 뒤늦게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1979년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04호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사랑채 서쪽 담장에 나 있는 대문을 살며시 열고 고개만 내밀어 본다. 꽁꽁 얼어붙은 연당에는 희미하게 내려앉은 하늘과 나뭇잎을 떠나보내고 외로워진 나무 그림자, 그리고 화려한 여름을 보낸 연꽃의 흔적들이 서로 어울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하엽정 누마루에 잠시 올라선다. 天地人, 하늘과 땅 그리고 내가 하나가 된다. 연꽃 가득한 저 연못을 땅으로, 가운데 둥근 섬을 하늘로, 그리고 누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 옛 선비들은 이런 도가적인 유유자적한 풍류를 즐겼으리라. 여기가 바로 낙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선생께서는 여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우신 듯 뒷산 대나무 숲의 시원한 바람과 백일홍,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는 여름날에 술을 배워서 꼭 다시 한 번 더 찾아오라신다.

 

 묘골에 가면 육신사(六臣祠)와 태고정(太古亭, 보물 제554호)을 반드시 찾아봐야 한다. 육신사는 원래 후손들이 박팽년의 뜻을 기려 모신 사당인 낙빈사(洛濱祠)를 지어 배향하다가 후손의 꿈속에 사육신의 모습이 사당 바깥에 서성이고 있어 그 후 다섯 분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태고정은 박일산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아 99칸 종택을 짓고 살면서 세운 정자이다. 이곳에 서서 태고정 지붕을 한번 올려다보는 여유를 가져봤으면 좋겠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엔 팔작지붕, 왼쪽엔 맞배지붕, 그 옆으로는 부섭지붕으로 마감한 독특한 지붕형태를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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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신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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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삼가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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