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영릉(驪州 寧陵, 사적 제195호, 경기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孝宗, 1619~659)과 인선왕후 장 씨(仁宣王后 張 氏, 1618∼1674)의 쌍릉이다. 특히 영릉은 효종릉과 인선왕후릉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지 않고 아래위로 배치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형식을 취하고 있다.
원래 효릉은 양주 검암산(儉嚴山)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조성하였으나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능침의 누수가 우려되어 여주 영릉(英陵) 동쪽 언덕으로 이장하면서 ‘영릉(寧陵)’으로 고쳤다.

<여주 영릉 전경 사진제공=여주시청>
효릉은 병풍석은 세우지 않고,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곡담을 쌓았다. 봉분을 감싸 안은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지 문자를 새겨 놓았다.

<영릉(효종릉) 사진제공=여주시청>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을 세웠지만 이때부터 간소화시켰다. 석물은 석양)·석호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을 두었다.
능원 아래에는 다른 조선왕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禁川)이 흐르고 있다.

<효종대왕릉 재실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 보물 제1532호)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이 제실은 현존하는 조선조 왕릉 재실 중에서 건물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적 가치를 한흥 더 높여주고 있다.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사진제공=문화재청>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驪州 孝宗大王陵(寧陵) 淮陽木, 천연기념물 제459호) 회양목은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이다.
효종은 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1619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효종은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다. 귀국 후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어 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효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스런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또한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정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59년, 재위 10년 만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덕수장씨(德水張氏) 장유(張維)의 딸로 1618년에 태어나 1631년 당시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렸다.1645년에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비가 되었고, 봉림대군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갈 당시 같이 따라가 뒷바라지도 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며 56세의 나이로 1674년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 여주시청
여주 영릉(驪州 寧陵, 사적 제195호, 경기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孝宗, 1619~659)과 인선왕후 장 씨(仁宣王后 張 氏, 1618∼1674)의 쌍릉이다. 특히 영릉은 효종릉과 인선왕후릉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지 않고 아래위로 배치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형식을 취하고 있다.
원래 효릉은 양주 검암산(儉嚴山)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조성하였으나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능침의 누수가 우려되어 여주 영릉(英陵) 동쪽 언덕으로 이장하면서 ‘영릉(寧陵)’으로 고쳤다.
<여주 영릉 전경 사진제공=여주시청>
효릉은 병풍석은 세우지 않고, 왕릉 바깥쪽으로 나지막한 곡담을 쌓았다. 봉분을 감싸 안은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동자석(童子石)에는 십이지 문자를 새겨 놓았다.
<영릉(효종릉) 사진제공=여주시청>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을 세웠지만 이때부터 간소화시켰다. 석물은 석양)·석호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을 두었다.
능원 아래에는 다른 조선왕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禁川)이 흐르고 있다.
<효종대왕릉 재실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 보물 제1532호)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이 제실은 현존하는 조선조 왕릉 재실 중에서 건물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적 가치를 한흥 더 높여주고 있다.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사진제공=문화재청>
여주 효종대왕릉(영릉) 회양목 (驪州 孝宗大王陵(寧陵) 淮陽木, 천연기념물 제459호) 회양목은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이다.
효종은 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로 1619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효종은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다. 귀국 후 1646년(인조 23) 소현 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어 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인조 27)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효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스런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또한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정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59년, 재위 10년 만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덕수장씨(德水張氏) 장유(張維)의 딸로 1618년에 태어나 1631년 당시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렸다.1645년에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비가 되었고, 봉림대군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갈 당시 같이 따라가 뒷바라지도 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며 56세의 나이로 1674년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 여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