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에 위치한 숭릉(崇陵)은 조선 18대 현종(顯宗, 1641~1674)과 명성왕후 김 씨(明聖王后 金 氏, 1642~1683)의 능이다. 동구릉 내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숭릉은 조류보호지구로 지정되어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뒷쪽에서 바라본 숭릉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숭릉은 1674년에 현종의 능을 먼저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을 왕릉과 나란히 조성하였다.

<숭릉 전경>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는 각각 혼유석이 놓여 있다.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특히 이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이 여주로 천장할 당시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능을 조성하였다.

<숭릉 정자각 사진제공=문화재청>
능침 아래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형태의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보물 제1742호)은이 있다. 1674년 건립한 정자각은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평면으로 다른 왕릉의 정자각보다 규모가 크다. 이 정자각은 왕릉의 임시 빈전인 영악전(靈幄殿, 왕과 왕비의 관을 모셔와 모시는 곳)을 짓지 않은 채 조성되어 정전의 전후 기둥간격을 이전보다 넓히고, 8칸 제도로 확대하여 건립하게 된 것이다.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 씨의 맏아들로, 1641년(인조 19)에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던 현종은 1644년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돌아와 매일같이 아버지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고 한다. 1649년(인조 27)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659년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해복제(己亥服制), 효종의 상을 당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 씨(慈懿大妃 趙 氏)의 복제문제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으로 당쟁이 계속되어 혼란한 시기를 보냈다. 현종은 재위기간 중 조선왕조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군비 강화와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또한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1674년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숭릉과 정자각 사진제공=문화재청>
명성왕후 김 씨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과 덕은부부인 송 씨의 딸로, 1651년(효종 2)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명성왕후 소생으로는 숙종(肅宗)과 명선, 명혜, 명안공주가 있으며, 아들인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683년(숙종 9)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에 위치한 숭릉(崇陵)은 조선 18대 현종(顯宗, 1641~1674)과 명성왕후 김 씨(明聖王后 金 氏, 1642~1683)의 능이다. 동구릉 내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숭릉은 조류보호지구로 지정되어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뒷쪽에서 바라본 숭릉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숭릉은 1674년에 현종의 능을 먼저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84년(숙종 10)에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을 왕릉과 나란히 조성하였다.
<숭릉 전경>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는 각각 혼유석이 놓여 있다.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특히 이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이 여주로 천장할 당시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능을 조성하였다.
<숭릉 정자각 사진제공=문화재청>
능침 아래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형태의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보물 제1742호)은이 있다. 1674년 건립한 정자각은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평면으로 다른 왕릉의 정자각보다 규모가 크다. 이 정자각은 왕릉의 임시 빈전인 영악전(靈幄殿, 왕과 왕비의 관을 모셔와 모시는 곳)을 짓지 않은 채 조성되어 정전의 전후 기둥간격을 이전보다 넓히고, 8칸 제도로 확대하여 건립하게 된 것이다.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 씨의 맏아들로, 1641년(인조 19)에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던 현종은 1644년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돌아와 매일같이 아버지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고 한다. 1649년(인조 27)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659년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해복제(己亥服制), 효종의 상을 당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 씨(慈懿大妃 趙 氏)의 복제문제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으로 당쟁이 계속되어 혼란한 시기를 보냈다. 현종은 재위기간 중 조선왕조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군비 강화와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또한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1674년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숭릉과 정자각 사진제공=문화재청>
명성왕후 김 씨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과 덕은부부인 송 씨의 딸로, 1651년(효종 2)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명성왕후 소생으로는 숙종(肅宗)과 명선, 명혜, 명안공주가 있으며, 아들인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683년(숙종 9)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