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은 예로부터 의(義)와 예(禮)를 중시하며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선비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어 '정신문화의 수도'라 부른다.
안동댐 입구에 자리 잡은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法興洞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85호,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103)은 조선 사대부 주택으로, 지금도 대쪽 같은 선비정신을 이어받은 고성이씨 탑동파 종손이 살고 있다.
고성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뒤편으로는 영남산(嶺南山)이, 앞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형으로 산비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의 아들 이증(李增) 선생이 이곳에 터전을 잡으면서 고성이씨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원래 이 마을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은 법흥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며 마을 이름도 ‘법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택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작은 계곡을 끼고 넓은 대지에 자리 잡고 있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고성이씨 11대 이후식(李後植, 1653∼1714)이 조선 숙종 때인 1685년에 안채를 짓고 이어 사랑채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손자인 이원미(李元美)가 완성하고 별당인 '영모당(永慕堂)'도 지었다. 별당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언덕 위계곡에 있는 정자, '북정(北亭)'은 이종주(李宗周)가 영조 51년(1775)에 지었으며, 후손인 이정수(李定秀)가 사랑채 '정우재(淨友齋)'를 지었다. 순조 24년(1824)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고, 1991년에는 안채의 정침을 고쳐지었다.

<중앙선 철로와 안동댐이 만들어지기 전 종택 전경>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고성이씨 차종손 이효근 씨의 말에 의하면 한일합방 이후 일제강점기에 종택을 일본 수비대에 점령당하고 안동시 남선면 현내리의 재사로 이거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은 중앙선 철로 공사를 하면서 북후역에서 무릉역으로 가는 직선노선을 포기하고 약 10Km를 우회하며 안동의 중심을 관통하는 철로를 놓았다. 이것은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하나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과 이 종택을 없애 안동의 중심을 쇠말뚝이 아닌 철로로 막아 민족의 정기를 끊어 더 이상 안동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그 당시 차종손의 증조부께서는 각처에 도움을 요청하고 많은 돈을 써서 다행히 종택을 피해 대문 앞으로 철로가 지나가도록 설계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철로 때문에 종택과 임청각은 전체가 사라지는 위기를 면하고, 그나마 종택은 행랑채와 곳간채 그리고 계곡과 강이 합쳐지는 곳에 있던 방앗간, 노비들과 소작인들이 살던 초가들만 유실되었다고 한다.

<대문에서 바라본 집 전경>
대문 앞에 통일신라 시대에 벽돌로 쌓아올린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이 우뚝 서 있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부터 영모당, 정우재, 안채, 사당 순으로 옆으로 길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북정은 영모당 뒤쪽 언덕 위에 서 있다.

<별당인 영모당 전경>
솟을대문을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별당인 ‘영모당’이 눈에 들어온다. 넓은 영지 뒤편에 자리 잡은 영모당은 안채보다 더 높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 별당은 왼쪽에 4칸 대청을, 오른쪽에 방을 두었다. 앞쪽과 옆면으로 쪽마루를 두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하였으며, 별당채와 연못 주변에는 나지막한 나무를 심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였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사랑채 정우재>
사랑채인 ‘정우재’는 영지 오른쪽, 안채와 영모당 사이에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우재는 왼쪽으로 2칸 마루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사랑방을 배치하였다. 앞면과 마루방 측면에는 쪽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설치해 놓았으며, 출입은 마루방 뒤편에서 가능하도록 하였다.

<안채>
중문간채를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 너머 높은 기단 위에 큰 규모의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ㅂ’자형의 안채영역은 크고 작은 2개의 마당을 가지고 있다. 안채는 8칸 규모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안방과 건넌방을 각각 두었다. 안대청 오른쪽에 있는 안방은 우익사를 앞으로 길게 달아내어 부엌과 연결시켰으며, 안대청 왼쪽은 건넌방 앞으로 좌익사를 길에 달아내어 방을 각각 두었다. 부엌 끝칸 오른쪽으로는 건물을 옆으로 연장시켜 봉당과 부엌방을 두었으며, 안방 뒤편에 있는 골방 옆으로는 건물을 연장시켜 온돌방을 두었다. 부엌쪽 건물 끝과 온돌방쪽 건물을 토담으로 연결해 사주문을 만들고 폐쇄적인 작은마당을 두었다.
중문채는 왼쪽부터 광, 마구간, 고방 순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부엌과 아랫방이 연결되어 있다.

<북정>
정자인 ‘북정’은 영모당 뒤편 숲 속에 계곡을 향해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앙칸이 앞으로 돌출된 ‘T'자형으로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좌우에 마루방,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배치하였다.
사당은 건물들 중 가장 동북쪽에 독립적인 담을 두르고 협문을 내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1칸 규모의 ‘一 ’자형 건물로,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 놓았다.
종택 바로 옆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도 있어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주택을 둘러보기 좋다.
자료제공= 문화재청, 네이버카페 강릉 선교장
경북 안동은 예로부터 의(義)와 예(禮)를 중시하며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선비들의 정신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어 '정신문화의 수도'라 부른다.
안동댐 입구에 자리 잡은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法興洞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85호,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103)은 조선 사대부 주택으로, 지금도 대쪽 같은 선비정신을 이어받은 고성이씨 탑동파 종손이 살고 있다.
고성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뒤편으로는 영남산(嶺南山)이, 앞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형으로 산비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의 아들 이증(李增) 선생이 이곳에 터전을 잡으면서 고성이씨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원래 이 마을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은 법흥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며 마을 이름도 ‘법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택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작은 계곡을 끼고 넓은 대지에 자리 잡고 있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고성이씨 11대 이후식(李後植, 1653∼1714)이 조선 숙종 때인 1685년에 안채를 짓고 이어 사랑채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손자인 이원미(李元美)가 완성하고 별당인 '영모당(永慕堂)'도 지었다. 별당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언덕 위계곡에 있는 정자, '북정(北亭)'은 이종주(李宗周)가 영조 51년(1775)에 지었으며, 후손인 이정수(李定秀)가 사랑채 '정우재(淨友齋)'를 지었다. 순조 24년(1824)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고, 1991년에는 안채의 정침을 고쳐지었다.
<중앙선 철로와 안동댐이 만들어지기 전 종택 전경>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고성이씨 차종손 이효근 씨의 말에 의하면 한일합방 이후 일제강점기에 종택을 일본 수비대에 점령당하고 안동시 남선면 현내리의 재사로 이거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은 중앙선 철로 공사를 하면서 북후역에서 무릉역으로 가는 직선노선을 포기하고 약 10Km를 우회하며 안동의 중심을 관통하는 철로를 놓았다. 이것은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하나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과 이 종택을 없애 안동의 중심을 쇠말뚝이 아닌 철로로 막아 민족의 정기를 끊어 더 이상 안동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었다. 그 당시 차종손의 증조부께서는 각처에 도움을 요청하고 많은 돈을 써서 다행히 종택을 피해 대문 앞으로 철로가 지나가도록 설계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철로 때문에 종택과 임청각은 전체가 사라지는 위기를 면하고, 그나마 종택은 행랑채와 곳간채 그리고 계곡과 강이 합쳐지는 곳에 있던 방앗간, 노비들과 소작인들이 살던 초가들만 유실되었다고 한다.
<대문에서 바라본 집 전경>
대문 앞에 통일신라 시대에 벽돌로 쌓아올린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이 우뚝 서 있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부터 영모당, 정우재, 안채, 사당 순으로 옆으로 길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북정은 영모당 뒤쪽 언덕 위에 서 있다.
<별당인 영모당 전경>
솟을대문을 들어오면 가장 먼저 별당인 ‘영모당’이 눈에 들어온다. 넓은 영지 뒤편에 자리 잡은 영모당은 안채보다 더 높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 별당은 왼쪽에 4칸 대청을, 오른쪽에 방을 두었다. 앞쪽과 옆면으로 쪽마루를 두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하였으며, 별당채와 연못 주변에는 나지막한 나무를 심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였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사랑채 정우재>
사랑채인 ‘정우재’는 영지 오른쪽, 안채와 영모당 사이에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우재는 왼쪽으로 2칸 마루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사랑방을 배치하였다. 앞면과 마루방 측면에는 쪽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설치해 놓았으며, 출입은 마루방 뒤편에서 가능하도록 하였다.
<안채>
중문간채를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 너머 높은 기단 위에 큰 규모의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ㅂ’자형의 안채영역은 크고 작은 2개의 마당을 가지고 있다. 안채는 8칸 규모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안방과 건넌방을 각각 두었다. 안대청 오른쪽에 있는 안방은 우익사를 앞으로 길게 달아내어 부엌과 연결시켰으며, 안대청 왼쪽은 건넌방 앞으로 좌익사를 길에 달아내어 방을 각각 두었다. 부엌 끝칸 오른쪽으로는 건물을 옆으로 연장시켜 봉당과 부엌방을 두었으며, 안방 뒤편에 있는 골방 옆으로는 건물을 연장시켜 온돌방을 두었다. 부엌쪽 건물 끝과 온돌방쪽 건물을 토담으로 연결해 사주문을 만들고 폐쇄적인 작은마당을 두었다.
중문채는 왼쪽부터 광, 마구간, 고방 순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부엌과 아랫방이 연결되어 있다.
<북정>
정자인 ‘북정’은 영모당 뒤편 숲 속에 계곡을 향해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앙칸이 앞으로 돌출된 ‘T'자형으로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좌우에 마루방,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배치하였다.
사당은 건물들 중 가장 동북쪽에 독립적인 담을 두르고 협문을 내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1칸 규모의 ‘一 ’자형 건물로,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해 놓았다.
종택 바로 옆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도 있어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주택을 둘러보기 좋다.
자료제공= 문화재청, 네이버카페 강릉 선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