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明紬)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로 흔히 ‘비단’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는 기후나 풍토가 양잠에 적합하고, 상고시대로부터 명주짜기(明紬짜기,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를 해왔다. 삼국 시대에는 증·백·견·시(絁)·겸(縑)·주(紬) 등 다양한 비단을 생산하였으며, 색·문양도 다양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고려금(高麗錦)·고려백금(高麗白錦)·한금(韓錦)·조하금(朝霞錦) 등이 특산 직물로서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그 제직 기술도 전파시켰다. 조선 시대에는 뛰어난 기술로 짠 각색 주(紬)를 중국으로 수출하였으며 ‘능라장’, ‘방직장’이라는 장인도 있었다. 예전에는 가정에서 재래식 베틀로 명주를 짜서 옷감으로 자급자족하였으나 근대기에는 나일론이 발명되고 방직공장이 세워지면서 전통 직물을 짜는 기술은 점점 쇠퇴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명주짜기 사진제공=문화재청>
우리나라 ‘명주짜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고조선부터 양잠을 해왔고, 삼국 시대에는 ‘주’로 명명되었으며, 신라에서는 나라에서 왕과 왕비가 농상(農桑)과 길쌈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주 또는 면주(綿紬)로 명명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잠실(蠶室)을 두어 양잠을 발전시켰으며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였다. 뿐만 아니라 《잠상집요 (蠶桑輯要)》와 같은 문헌을 펴내어 기술 지도도 하였다. 또한 주·토주(吐紬, 土紬)·정주(鼎紬)·수주(水紬)·또는 영흥주(永興紬)·희천주(熙川紬)·상주주(尙州紬)·성천주(成川紬) 등 제직되는 지역명에 ‘주’를 붙이기도 하였으며, 1803년에 중국에 보낸 직물품목 중에 백병주·홍명주 등의 주가 사행기록(使行記錄)인 《계산기정 (薊山紀程)》에 기록되어 있고, 《규합총서 (閨閤叢書)》에는 성천(成川)·명천(明川)·덕천(德川)·영동(永同)·회양(淮陽)의 명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누에고치>
명주짜기는 누에고치로 명주짜기 과정을 크게 제사(製絲, 실써기), 정경(整經, 날실걸기), 직포(織布, 명주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제사(실써기)는 끓는 물에 고치를 넣어 뽑힌 실(묵지)을 물레(왕쳉이)·자새(자애)를 이용, 실을 켜서 타래실로 만드는 과정이다. 한 개의 고치에서는 1200∼1500m의 실이 나오고, 이 실은 천연섬유 가운데 가장 길다.

<명주실써기 사진제공=문화재청>
실내리기(解絲)는 타래실을 명주가락에 감아 해사한 다음 10개 가락(꾸리)의 실끝을 고무래 10구멍에 끼워 날틀과 걸틀을 오가며 경사날기를 하는데, 4차례 왕복으로 1새(80올)가 되며, 15새는 60왕복으로 총경사는 1,200올이 된다.
이어 바디꿰기를 해준 다음, 도투마리에 매고 한쪽은 끄싱개에 감아 당긴 다음 쌀풀을 먹여 왕겨 잿불에 말리는 베매기 작업이 끝나면 도투마리에 감아준다.
이를 베틀에 얹고 잉아실을 걸고 날실 끝을 말코에 매어 말코를 부리에 연결한다. 직녀가 베틀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걸고 베틀신을 신고 발을 앞뒤로 밀고 당기며 날실을 개구(開口)시켜 북 속의 씨실꾸리에서 씨실을 넣고 바디로 치면 명주짜기가 시작된다.

<생명주 사진제공=문화재청>
전통적인 명주짜기는 1988년 기능보유자 고 조옥이(曺玉伊) 선생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었으나 지난 2007년에 별세한 후로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문화재청은 2016년 12월에 ‘명주짜기’는 단체종목으로 전환하였으며, 경북 경주시 양북면 두산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산 손명주 연구회’를 보유단체로 인정 예고해 명주짜기 전승의 맥을 유지하고자하고 있다.

<명주짜기(두산 손명주 연구회) 사진제공=문화재청>
‘두산 손명주 연구회’는 마을에서 개별적으로 길쌈을 해오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단체로, 지난 1996년 마을 내에서 손명주 작목반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2002년에 ‘두산 손명주 연구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주민들은 전통방식의 ‘명주짜기’의 올바른 보존·전승과 발전에 힘쓰고 있으며, 단체 구성원 대부분이 명주 짜는 과정을 숙지하고 있고 마을 주민들의 협업을 통해 전통방식의 명주 짜는 기술을 전승하고 있다.
자료제공=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주(明紬)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로 흔히 ‘비단’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는 기후나 풍토가 양잠에 적합하고, 상고시대로부터 명주짜기(明紬짜기,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를 해왔다. 삼국 시대에는 증·백·견·시(絁)·겸(縑)·주(紬) 등 다양한 비단을 생산하였으며, 색·문양도 다양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고려금(高麗錦)·고려백금(高麗白錦)·한금(韓錦)·조하금(朝霞錦) 등이 특산 직물로서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그 제직 기술도 전파시켰다. 조선 시대에는 뛰어난 기술로 짠 각색 주(紬)를 중국으로 수출하였으며 ‘능라장’, ‘방직장’이라는 장인도 있었다. 예전에는 가정에서 재래식 베틀로 명주를 짜서 옷감으로 자급자족하였으나 근대기에는 나일론이 발명되고 방직공장이 세워지면서 전통 직물을 짜는 기술은 점점 쇠퇴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명주짜기 사진제공=문화재청>
우리나라 ‘명주짜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고조선부터 양잠을 해왔고, 삼국 시대에는 ‘주’로 명명되었으며, 신라에서는 나라에서 왕과 왕비가 농상(農桑)과 길쌈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주 또는 면주(綿紬)로 명명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잠실(蠶室)을 두어 양잠을 발전시켰으며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였다. 뿐만 아니라 《잠상집요 (蠶桑輯要)》와 같은 문헌을 펴내어 기술 지도도 하였다. 또한 주·토주(吐紬, 土紬)·정주(鼎紬)·수주(水紬)·또는 영흥주(永興紬)·희천주(熙川紬)·상주주(尙州紬)·성천주(成川紬) 등 제직되는 지역명에 ‘주’를 붙이기도 하였으며, 1803년에 중국에 보낸 직물품목 중에 백병주·홍명주 등의 주가 사행기록(使行記錄)인 《계산기정 (薊山紀程)》에 기록되어 있고, 《규합총서 (閨閤叢書)》에는 성천(成川)·명천(明川)·덕천(德川)·영동(永同)·회양(淮陽)의 명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누에고치>
명주짜기는 누에고치로 명주짜기 과정을 크게 제사(製絲, 실써기), 정경(整經, 날실걸기), 직포(織布, 명주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제사(실써기)는 끓는 물에 고치를 넣어 뽑힌 실(묵지)을 물레(왕쳉이)·자새(자애)를 이용, 실을 켜서 타래실로 만드는 과정이다. 한 개의 고치에서는 1200∼1500m의 실이 나오고, 이 실은 천연섬유 가운데 가장 길다.
<명주실써기 사진제공=문화재청>
실내리기(解絲)는 타래실을 명주가락에 감아 해사한 다음 10개 가락(꾸리)의 실끝을 고무래 10구멍에 끼워 날틀과 걸틀을 오가며 경사날기를 하는데, 4차례 왕복으로 1새(80올)가 되며, 15새는 60왕복으로 총경사는 1,200올이 된다.
이어 바디꿰기를 해준 다음, 도투마리에 매고 한쪽은 끄싱개에 감아 당긴 다음 쌀풀을 먹여 왕겨 잿불에 말리는 베매기 작업이 끝나면 도투마리에 감아준다.
이를 베틀에 얹고 잉아실을 걸고 날실 끝을 말코에 매어 말코를 부리에 연결한다. 직녀가 베틀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걸고 베틀신을 신고 발을 앞뒤로 밀고 당기며 날실을 개구(開口)시켜 북 속의 씨실꾸리에서 씨실을 넣고 바디로 치면 명주짜기가 시작된다.
<생명주 사진제공=문화재청>
전통적인 명주짜기는 1988년 기능보유자 고 조옥이(曺玉伊) 선생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었으나 지난 2007년에 별세한 후로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문화재청은 2016년 12월에 ‘명주짜기’는 단체종목으로 전환하였으며, 경북 경주시 양북면 두산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산 손명주 연구회’를 보유단체로 인정 예고해 명주짜기 전승의 맥을 유지하고자하고 있다.
<명주짜기(두산 손명주 연구회) 사진제공=문화재청>
‘두산 손명주 연구회’는 마을에서 개별적으로 길쌈을 해오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단체로, 지난 1996년 마을 내에서 손명주 작목반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2002년에 ‘두산 손명주 연구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주민들은 전통방식의 ‘명주짜기’의 올바른 보존·전승과 발전에 힘쓰고 있으며, 단체 구성원 대부분이 명주 짜는 과정을 숙지하고 있고 마을 주민들의 협업을 통해 전통방식의 명주 짜는 기술을 전승하고 있다.
자료제공=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