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 ‘씨름’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맞잡고 힘과 기술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려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서,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민속놀이이다.

<강릉단오제 씨름경기>
한자로는 각희(角戱)·각저(角·)·각력(角力)·상박(相撲)로 부르는 ‘씨름’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영남지방에서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는 것을 '씨룬다'는 말에서 씨룸→씨름으로 명사화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예로부터 단오를 비롯하여 명절은 물론 농한기나 사람이 모이는 장터 등지에서 행해지던 씨름은 원시 시대에는 자기보호를 위한 생활의 수단으로 행해지다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놀이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씨름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滿洲) 통화성에서 발견된 각저총(角抵塚)에 씨름하는 벽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이미 씨름이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고려 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권36에 "충혜왕(忠惠王) 원년(1339년)에 왕이 나랏일을 총신들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들과 씨름을 하여 위와 아래가 없더라."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화가 유숙의 대쾌도 자료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씨름은 널리 보급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권31, 《명종실록(明宗實錄)》권26과 《현종실록(顯宗實錄)》권7 등에 씨름에 관한 내용이 나오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 단오조>에 금산지방(지금의 김천) 풍속으로 단옷날에 수천 명이 씨름을 구경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1890년 씨름경기>
근대에 와서 1912년 최초로 씨름대회가 서울 단성사극장에서 열렸고, 1915년에는 서울 광무대극장 주관으로 이틀 동안 씨름대회가 열렸다. 그러다가 조선씨름협회가 생기고, 1927년 전국적인 씨름대회가 열리는 등 조직적인 모습을 띠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1942년부터 열리지 못하였다.
1947년 제7회 씨름대회가 개최된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1972년 씨름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인 스포츠로 변화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샅바의 명칭>
씨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샅바로, 샅바 고리를 먼저 맨 다음 다리에 걸어 샅바를 맨다.
샅바를 잡는 요령은 먼저, 서로 마주보고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의 오른쪽 어깨와 상대 오른쪽 어깨를 밀착시키고, 자기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허리샅바를 재봉선을 넘지 않게 잡는다. 다음으로 자기 왼손으로 상대 오른쪽 다리샅바를 안쪽으로 끼워 밖으로 잡는다.
씨름의 기술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손(팔)기술 ― 앞무릎치기, 앞무릎치기 되치기(잡채기), 비켜 앞무릎치기, 연속 앞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되치기(밧다리), 오금당기기, 옆무릎치기, 손목잡아 짚기, 앞무릎짚어 오금당기기, 발목당기기, 오금당겨 안다리치기 외
② 발(다리)기술 ― 밧다리치기, 밧다리후리기, 안다리걸기, 안다리되치기(빗장걸이), 안다리걸어 돌리기, 호미걸이, 덧걸이, 밧다리배지기 외
③ 들(허리)기술 ― 들배지기, 엉덩배지기, 돌림배지기, 이중배지기, 들어 주저앉히기, 들어잡채기, 들어 앞무릎치기, 밀어치기
④ 혼성(종합)기술 ― 잡채기, 차돌리기, 등쳐밧다리, 등쳐돌리기, 정면뒤집기, 팔걸어 뒤집기, 목말아 뒤집기 외

<울산 대송시장에서 상인과 손님들의 씨름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한국을 대표하는 세시풍속 놀이인 '씨름'은 다양한 놀이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온 국민에 의해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는 점, 고대 삼국 시대부터 근대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물, 문헌, 회화 등에서 명확한 역사성이 확인된다는 점, 씨름판의 구성과 기술 방식 등에서 우리나라만의 고유성과 표현미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 한국 전통놀이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구대상이라는 점 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료제공= 문화콘텐츠닷컴,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우리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 ‘씨름’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맞잡고 힘과 기술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려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서,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민속놀이이다.
<강릉단오제 씨름경기>
한자로는 각희(角戱)·각저(角·)·각력(角力)·상박(相撲)로 부르는 ‘씨름’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영남지방에서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는 것을 '씨룬다'는 말에서 씨룸→씨름으로 명사화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예로부터 단오를 비롯하여 명절은 물론 농한기나 사람이 모이는 장터 등지에서 행해지던 씨름은 원시 시대에는 자기보호를 위한 생활의 수단으로 행해지다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놀이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씨름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滿洲) 통화성에서 발견된 각저총(角抵塚)에 씨름하는 벽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이미 씨름이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고려 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권36에 "충혜왕(忠惠王) 원년(1339년)에 왕이 나랏일을 총신들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들과 씨름을 하여 위와 아래가 없더라."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화가 유숙의 대쾌도 자료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씨름은 널리 보급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권31, 《명종실록(明宗實錄)》권26과 《현종실록(顯宗實錄)》권7 등에 씨름에 관한 내용이 나오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 단오조>에 금산지방(지금의 김천) 풍속으로 단옷날에 수천 명이 씨름을 구경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1890년 씨름경기>
근대에 와서 1912년 최초로 씨름대회가 서울 단성사극장에서 열렸고, 1915년에는 서울 광무대극장 주관으로 이틀 동안 씨름대회가 열렸다. 그러다가 조선씨름협회가 생기고, 1927년 전국적인 씨름대회가 열리는 등 조직적인 모습을 띠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1942년부터 열리지 못하였다.
1947년 제7회 씨름대회가 개최된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1972년 씨름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인 스포츠로 변화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샅바의 명칭>
씨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샅바로, 샅바 고리를 먼저 맨 다음 다리에 걸어 샅바를 맨다.
샅바를 잡는 요령은 먼저, 서로 마주보고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의 오른쪽 어깨와 상대 오른쪽 어깨를 밀착시키고, 자기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허리샅바를 재봉선을 넘지 않게 잡는다. 다음으로 자기 왼손으로 상대 오른쪽 다리샅바를 안쪽으로 끼워 밖으로 잡는다.
씨름의 기술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손(팔)기술 ― 앞무릎치기, 앞무릎치기 되치기(잡채기), 비켜 앞무릎치기, 연속 앞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되치기(밧다리), 오금당기기, 옆무릎치기, 손목잡아 짚기, 앞무릎짚어 오금당기기, 발목당기기, 오금당겨 안다리치기 외
② 발(다리)기술 ― 밧다리치기, 밧다리후리기, 안다리걸기, 안다리되치기(빗장걸이), 안다리걸어 돌리기, 호미걸이, 덧걸이, 밧다리배지기 외
③ 들(허리)기술 ― 들배지기, 엉덩배지기, 돌림배지기, 이중배지기, 들어 주저앉히기, 들어잡채기, 들어 앞무릎치기, 밀어치기
④ 혼성(종합)기술 ― 잡채기, 차돌리기, 등쳐밧다리, 등쳐돌리기, 정면뒤집기, 팔걸어 뒤집기, 목말아 뒤집기 외
<울산 대송시장에서 상인과 손님들의 씨름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한국을 대표하는 세시풍속 놀이인 '씨름'은 다양한 놀이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온 국민에 의해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는 점, 고대 삼국 시대부터 근대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물, 문헌, 회화 등에서 명확한 역사성이 확인된다는 점, 씨름판의 구성과 기술 방식 등에서 우리나라만의 고유성과 표현미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 한국 전통놀이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구대상이라는 점 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료제공= 문화콘텐츠닷컴,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