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릉(穆陵)은 조선 14대 선조(宣祖,1552~1608)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 씨(懿仁王后 朴 氏, 1555 ~1600)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 씨(仁穆王后 金 氏, 1584 ~1632)의 능으로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선조, 가운데가 의인왕후 박 씨, 오른쪽이 인목왕후 김 씨의 능이다.

<목릉의 항공사진>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이 생략되었고,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꽃무늬를 새겨놓았다.

<동구릉 목릉 정자각>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으며, 특히 1630년 목릉 이건 시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보물 제 1743호)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이다.
목릉은 1600년 의인왕후 박 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먼저 조성되었고, 이후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가 물기가 차올라 1630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그후 인목왕후 박 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 위치에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로 능을 조성하였고 이후 모두 합쳐 목릉이라 하였다.

<목릉 선조릉>
선조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567년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에 오른 선조는 처음에 인순왕후의 수령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선조는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해 국정을 쇄신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사회적인 안정을 꾀하였지만 동서분당으로 인해 정권다툼이 일어나 혼란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두 차례의 왜군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이를 복구하려고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성품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선조는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목릉 의인왕후릉>
의인왕후 박 씨는 반남박씨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 씨의 딸로, 156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의인왕후는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과 같이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애로웠던 의인왕후는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목왕후 김 씨는 연안김씨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 씨의 딸로, 1602년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계축일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인목왕후는 왕위에 오른 광해군에 의해 1623년 서인으로 폐위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대왕대비에 오른 인목왕후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릉 중 한 지역에 가장 많은 왕릉이 있는 구리 동구릉, 조선 개국의 시조인 태조의 건원릉부터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의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
목릉(穆陵)은 조선 14대 선조(宣祖,1552~1608)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 씨(懿仁王后 朴 氏, 1555 ~1600)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 씨(仁穆王后 金 氏, 1584 ~1632)의 능으로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선조, 가운데가 의인왕후 박 씨, 오른쪽이 인목왕후 김 씨의 능이다.
<목릉의 항공사진>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이 생략되었고,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꽃무늬를 새겨놓았다.
<동구릉 목릉 정자각>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으며, 특히 1630년 목릉 이건 시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보물 제 1743호)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이다.
목릉은 1600년 의인왕후 박 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먼저 조성되었고, 이후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가 물기가 차올라 1630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그후 인목왕후 박 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 위치에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로 능을 조성하였고 이후 모두 합쳐 목릉이라 하였다.
<목릉 선조릉>
선조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567년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에 오른 선조는 처음에 인순왕후의 수령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선조는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해 국정을 쇄신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사회적인 안정을 꾀하였지만 동서분당으로 인해 정권다툼이 일어나 혼란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두 차례의 왜군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이를 복구하려고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성품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선조는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목릉 의인왕후릉>
의인왕후 박 씨는 반남박씨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 씨의 딸로, 156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의인왕후는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과 같이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애로웠던 의인왕후는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목왕후 김 씨는 연안김씨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 씨의 딸로, 1602년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계축일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인목왕후는 왕위에 오른 광해군에 의해 1623년 서인으로 폐위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대왕대비에 오른 인목왕후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릉 중 한 지역에 가장 많은 왕릉이 있는 구리 동구릉, 조선 개국의 시조인 태조의 건원릉부터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의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의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