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서쪽 교동(校洞)마을에 자리 잡은 경주 교동 최 씨 고택(慶州 校洞 崔 氏 古宅, 경북 경주시 교촌안길 27-40,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은 사람들에게 ‘경주 최부자집’으로 더 알려진 집이다. 역사의 향이 가득한 교동마을은 신라 때는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이고, 고려 시대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는 향교가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 다. 월성(月城)을 끼고 앞으로는 남천이 흐르는 이 마을은 최부자집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돌담길을 따라 전통한옥이 많이 남아 있으며 곳곳에 볼거리, 즐길거리가 다양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경주 교동마을 전경>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 재산을 지켜내고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은 경주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신라 시대 요석궁이 있던 이 터에 집을 지어 200년 간 내려오고 있다. 1600년대 초 경주 지방에서 처음 가문을 일으킨 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군을 물리친 최진립(崔震立)으로 약 200년 동안 경주 내남면 개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최부자집은 최진립부터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崔浚, 1884~1970)까지 대를 이어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옛말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3대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400년 동안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최부자집의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인 ‘육훈(六訓)을 듣고 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 만 석 이상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
-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또한 최부자집은 육훈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에게는 지신을 지키는 지침 ‘육연(六然)’을 매일 아침 익히게 하였다.
-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진다
- 유사감연(有事敢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 득의담연(得意淡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경주최씨 12대손 문파 최준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선생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해 조선국권회복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대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힘써 1920년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에는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 등과 함께 《동경통지》도 편찬해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인재양성에 뜻을 품은 선생은 해방 후 전 재산을 기증해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사랑채 전경>

조선 시대 전형적인 종가의 모습을 갖춘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은 넓은 대지 위에 대문채, 사랑채, 안채, 중문간채, 별당, 곳간채, 사당으로 이뤄져 있다.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펼쳐지고, ‘ㄱ’자형 사랑채가 서 있다. 사랑채는 사랑대청·사랑방·침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방과 누마루가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다. 이 사랑채는 1970년 화재로 새사랑채와 대문채가 함께 소실되었으나 2007년 복원하였다.
새사랑채는 아직 복원되지 못한 채 그 자리는 정원으로 꾸며놓았다.
대문채는 정면 7칸으로 솟을대문 양옆에 청지기방과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전경>
중문간채를 돌아 들어가면 안채영역이다. 잠시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내외벽이 설치되어 있는 중문간채 너머로 반듯하게 펼쳐진 안마당과 ‘冂’자형 안채가 자리하고, 마당 앞쪽에 나지막한 담장이 설치된 장독대가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5칸 반으로, 대청과 안방을 중심에 두고 양쪽에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대청 왼쪽에 건넌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마루와 온돌방을 차례로 배치한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안방 오른쪽으로 3칸 규모의 넓은 부엌을 두고 그 앞쪽으로 온돌방과 마루를 둔 익랑이 있다. 안채 중심부는 툇마루를 두고 익랑은 앞쪽에 쪽마루를 두어 출입하기 편리하도록 했다.

<곳간채 전경>
중문간채 앞쪽에 자리한 곳간채는 만석꾼 집안의 보관창고로 그 규모 또한 크다. 통풍이 잘 되도록 외부에 판벽을 시설한 곳간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쌀 800석을 보관했을 정도로 크다. 곳간채 앞에 시원스레 펼쳐진 넓은 마당은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거나 농사일을 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사당은 안채 북쪽으로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건축되어 있다.
조선 시대 경상도 최고 부자였던 경주 최부자집은 당시 숙식이 여의치 않았던 수많은 과객들이 머물러가던 집으로 떠날 때는 노잣돈과 음식까지 싸서 보내는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으로 모든 재산을 내놓았던 최부자집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부자의 덕목을 실천한 집안으로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경주 월성 서쪽 교동(校洞)마을에 자리 잡은 경주 교동 최 씨 고택(慶州 校洞 崔 氏 古宅, 경북 경주시 교촌안길 27-40,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은 사람들에게 ‘경주 최부자집’으로 더 알려진 집이다. 역사의 향이 가득한 교동마을은 신라 때는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이고, 고려 시대에는 향학이, 조선 시대에는 향교가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 다. 월성(月城)을 끼고 앞으로는 남천이 흐르는 이 마을은 최부자집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돌담길을 따라 전통한옥이 많이 남아 있으며 곳곳에 볼거리, 즐길거리가 다양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경주 교동마을 전경>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 재산을 지켜내고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은 경주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신라 시대 요석궁이 있던 이 터에 집을 지어 200년 간 내려오고 있다. 1600년대 초 경주 지방에서 처음 가문을 일으킨 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군을 물리친 최진립(崔震立)으로 약 200년 동안 경주 내남면 개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최부자집은 최진립부터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崔浚, 1884~1970)까지 대를 이어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옛말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3대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400년 동안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최부자집의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인 ‘육훈(六訓)을 듣고 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 만 석 이상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
-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또한 최부자집은 육훈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에게는 지신을 지키는 지침 ‘육연(六然)’을 매일 아침 익히게 하였다.
-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진다
- 유사감연(有事敢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 득의담연(得意淡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경주최씨 12대손 문파 최준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선생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 선생과 백산상회를 설립해 조선국권회복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대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힘써 1920년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에는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 등과 함께 《동경통지》도 편찬해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인재양성에 뜻을 품은 선생은 해방 후 전 재산을 기증해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사랑채 전경>
조선 시대 전형적인 종가의 모습을 갖춘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은 넓은 대지 위에 대문채, 사랑채, 안채, 중문간채, 별당, 곳간채, 사당으로 이뤄져 있다.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펼쳐지고, ‘ㄱ’자형 사랑채가 서 있다. 사랑채는 사랑대청·사랑방·침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 방과 누마루가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다. 이 사랑채는 1970년 화재로 새사랑채와 대문채가 함께 소실되었으나 2007년 복원하였다.
새사랑채는 아직 복원되지 못한 채 그 자리는 정원으로 꾸며놓았다.
대문채는 정면 7칸으로 솟을대문 양옆에 청지기방과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전경>
중문간채를 돌아 들어가면 안채영역이다. 잠시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내외벽이 설치되어 있는 중문간채 너머로 반듯하게 펼쳐진 안마당과 ‘冂’자형 안채가 자리하고, 마당 앞쪽에 나지막한 담장이 설치된 장독대가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5칸 반으로, 대청과 안방을 중심에 두고 양쪽에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대청 왼쪽에 건넌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마루와 온돌방을 차례로 배치한 익랑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안방 오른쪽으로 3칸 규모의 넓은 부엌을 두고 그 앞쪽으로 온돌방과 마루를 둔 익랑이 있다. 안채 중심부는 툇마루를 두고 익랑은 앞쪽에 쪽마루를 두어 출입하기 편리하도록 했다.
<곳간채 전경>
중문간채 앞쪽에 자리한 곳간채는 만석꾼 집안의 보관창고로 그 규모 또한 크다. 통풍이 잘 되도록 외부에 판벽을 시설한 곳간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쌀 800석을 보관했을 정도로 크다. 곳간채 앞에 시원스레 펼쳐진 넓은 마당은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거나 농사일을 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사당은 안채 북쪽으로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건축되어 있다.
조선 시대 경상도 최고 부자였던 경주 최부자집은 당시 숙식이 여의치 않았던 수많은 과객들이 머물러가던 집으로 떠날 때는 노잣돈과 음식까지 싸서 보내는 넉넉한 인심을 베풀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으로 모든 재산을 내놓았던 최부자집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부자의 덕목을 실천한 집안으로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