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장내마을 남쪽에 있는 묘적산의 한 줄기에서 뻗어 내린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궁집(宮집,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로 9)은 주변 숲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궁집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와 숙의 문씨(淑儀 文氏)의 소생인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1772)의 부마 능성위 구민화(綾城尉 具敏和, 1754~1800)의 집이다. 영조는 60세가 넘어 얻은 막내딸이 시집을 가자 궁의 목수가 사가를 지을 수 없는 관례까지 어겨가며 살림집을 마련해 준 것이다. 나라에서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주었기에 이 집을 ‘궁집(宮집)’이라 불렀다.

<남양주 궁집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12세에 출가한 화길옹주는 이 집에서 죽을 때까지 9년간 생활하였으며, 1944년 김우경(金宇卿)에게 매도되기 전까지 후손들이 거주하며 관리를 하였다. 그 후 1972년 현 소유주인 고(故) 권옥연(1923~2011)․박병복 부부가 매입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 무의자(無依子)재단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무의자(無衣子)는 ‘욕심을 벗어던진 사람’이란 의미를 지내고 있는 고(故) 권옥연 화백의 호이다. 예술가 부부는 고택을 비롯해 전통 목기구와 석물 등 우리 민속예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까닭에 궁집과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국의 고택을 매입해 이곳으로 이전해 복원시키는데 헌신을 다했다.
현재 궁집 주변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집으로 들어서면 고목들과 어우러진 고택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남양주 궁집은 약 2.6ha에 이르는 넓은 터에 궁집을 비롯해 10여동의 부속사와 전시관, 야외공연장 등 각 건물이 동서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리를 잡고 있다. 궁집 영역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2채의 초가 이외의 건물은 한옥에 관심이 많았던 고(故) 권옥연 씨가 서울, 용인, 군산 등에서 철거되던 한옥을 구입해 이건한 것으로서, 1974년부터 1982년경에 조성하였다.

<안채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궁집은 ‘冂’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문간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폐쇄된 ‘口’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의 남서쪽으로 치우쳐서 ‘ㄱ'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문간채를 통해 안채영역에 들어서면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한 정침공간은 정면 5칸 반, 측면 2칸, 양쪽 날개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 앞쪽 동쪽 날개채는 건넌방과 부엌이 연이어 있고, 서쪽 날개채는 아랫방과 마루방을 두었는데 이곳을 통하여 사랑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안방과 대청 앞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두었으며, 좌우 날개채의 정면으로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안채 후원 전경>
문간채는 5칸으로, 동쪽에서부터 대문간, 광, 다락방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모퉁이에 있는 다락방은 사랑채와 중첩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1칸의 내루(內樓)를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ㄱ’ 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다. 서쪽에서부터 대청마루 2칸, 온돌방 2칸을 배치했다. 동쪽 온돌방은 안채의 마루방을 통하여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방 앞쪽으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대청마루의 남쪽으로는 대청마루보다 1자 정도 높여 내루를 만들어 돌출시켰다. 사랑채 앞에는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사랑채로의 진입은 사랑마당의 동, 서쪽 담장에 낸 협문을 통해서 출입하도록 했다.

<사랑채 전경(2006년 경) 사진제공=문화재청>
도로변 입구에는 1994년에 세운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측에 창고를 한 칸씩 두고 가운데가 대문간을 배치했다.
이곳에는 궁집 이외에도 순조의 큰며느리인 신정왕후 조씨(1808~1890)의 친정집인 군산집. 구한말 송변준의 가옥이었던 용인집, 강강찬 장군의 사당이었던 건물을 이건해 온 다실이 있다.
먼저 용입집을 살펴보면, 원래 경기도 용인에 있었던 것을 옮겨다 지었으므로 용인집으로 부르고 있다. 1979년 이곳에 이건한 이 집은 앞쪽에 ‘ㄴ’자형 문간채를 두고, 그 후면에 ‘ㄱ’자형 안채를 연결한 튼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안방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2칸의 부엌, 1칸의 마루방, 1칸의 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남쪽으로는 2칸의 대청, 2칸의 건넌방을 배치하였다. 건넌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두고, 뒤로는 반 칸 규모의 마루방과 화장실을 두었다.

<용인집 전경>
앞에 커다란 연못을 두고 뒤로는 울창하게 우거진 송림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다실은 원래 낙성대 내에 있던 강감찬 장군 유적지의 서당이었으나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조성 때 해체하여 1982년 이곳에 이건한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자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안방 옆으로 전면에 1.5칸의 방을 붙이고 후면으로 1칸의 부엌을 두었다. 동쪽으로는 1칸의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고, 건넌방 북쪽으로는 방바닥보다 1자 정도 높여 1칸 반의 내루를 만들어 돌출시켰다. 내루의 전면은 연못 속에 장주초석을 세우고 자리 잡고 있어 내루에 앉아 문을 열면 마치 물속에 떠 있는 기분을 들게 한다.

<다실 전경>
군산집은 궁집 영역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순조의 큰며느리 신정왕후의 친정집의 일부로서 1981년에 이곳에 이건한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좌우 대칭의 ‘⊔’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 날개쪽에 방과 부엌을 배치하였다.

<군산집 전경>
지난 4월에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무의자박물관 관장이자 무대미술가인 이병복 여사가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공연 및 작업 과정을 담은 사진자료를 비롯한 의상스케치·가면·미니어처 등 무대미술 자료, 세계무대미술경연대회(PQ) 관련 자료 등 2,500여점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에 기증하였다.
궁집은, 아니 무의자박물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음악회,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지만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낡고 훼손된 고택을 보수하는데 여념이 없다. 고풍스런 문화공간으로 다시 우뚝 서게 될 그날을 기다려 본다.
(기자가 방문 당시 공사 중인 공간은 찍을 수 없어 문화재청 사진 3컷 사용)
남양주 장내마을 남쪽에 있는 묘적산의 한 줄기에서 뻗어 내린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궁집(宮집,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로 9)은 주변 숲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궁집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와 숙의 문씨(淑儀 文氏)의 소생인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1772)의 부마 능성위 구민화(綾城尉 具敏和, 1754~1800)의 집이다. 영조는 60세가 넘어 얻은 막내딸이 시집을 가자 궁의 목수가 사가를 지을 수 없는 관례까지 어겨가며 살림집을 마련해 준 것이다. 나라에서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주었기에 이 집을 ‘궁집(宮집)’이라 불렀다.
<남양주 궁집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12세에 출가한 화길옹주는 이 집에서 죽을 때까지 9년간 생활하였으며, 1944년 김우경(金宇卿)에게 매도되기 전까지 후손들이 거주하며 관리를 하였다. 그 후 1972년 현 소유주인 고(故) 권옥연(1923~2011)․박병복 부부가 매입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 무의자(無依子)재단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무의자(無衣子)는 ‘욕심을 벗어던진 사람’이란 의미를 지내고 있는 고(故) 권옥연 화백의 호이다. 예술가 부부는 고택을 비롯해 전통 목기구와 석물 등 우리 민속예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까닭에 궁집과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국의 고택을 매입해 이곳으로 이전해 복원시키는데 헌신을 다했다.
현재 궁집 주변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집으로 들어서면 고목들과 어우러진 고택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남양주 궁집은 약 2.6ha에 이르는 넓은 터에 궁집을 비롯해 10여동의 부속사와 전시관, 야외공연장 등 각 건물이 동서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리를 잡고 있다. 궁집 영역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2채의 초가 이외의 건물은 한옥에 관심이 많았던 고(故) 권옥연 씨가 서울, 용인, 군산 등에서 철거되던 한옥을 구입해 이건한 것으로서, 1974년부터 1982년경에 조성하였다.
<안채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궁집은 ‘冂’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문간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폐쇄된 ‘口’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의 남서쪽으로 치우쳐서 ‘ㄱ'자형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문간채를 통해 안채영역에 들어서면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한 정침공간은 정면 5칸 반, 측면 2칸, 양쪽 날개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 앞쪽 동쪽 날개채는 건넌방과 부엌이 연이어 있고, 서쪽 날개채는 아랫방과 마루방을 두었는데 이곳을 통하여 사랑채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안방과 대청 앞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두었으며, 좌우 날개채의 정면으로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안채 후원 전경>
문간채는 5칸으로, 동쪽에서부터 대문간, 광, 다락방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모퉁이에 있는 다락방은 사랑채와 중첩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1칸의 내루(內樓)를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ㄱ’ 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다. 서쪽에서부터 대청마루 2칸, 온돌방 2칸을 배치했다. 동쪽 온돌방은 안채의 마루방을 통하여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방 앞쪽으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대청마루의 남쪽으로는 대청마루보다 1자 정도 높여 내루를 만들어 돌출시켰다. 사랑채 앞에는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사랑채로의 진입은 사랑마당의 동, 서쪽 담장에 낸 협문을 통해서 출입하도록 했다.
<사랑채 전경(2006년 경) 사진제공=문화재청>
도로변 입구에는 1994년에 세운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측에 창고를 한 칸씩 두고 가운데가 대문간을 배치했다.
이곳에는 궁집 이외에도 순조의 큰며느리인 신정왕후 조씨(1808~1890)의 친정집인 군산집. 구한말 송변준의 가옥이었던 용인집, 강강찬 장군의 사당이었던 건물을 이건해 온 다실이 있다.
먼저 용입집을 살펴보면, 원래 경기도 용인에 있었던 것을 옮겨다 지었으므로 용인집으로 부르고 있다. 1979년 이곳에 이건한 이 집은 앞쪽에 ‘ㄴ’자형 문간채를 두고, 그 후면에 ‘ㄱ’자형 안채를 연결한 튼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안방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2칸의 부엌, 1칸의 마루방, 1칸의 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남쪽으로는 2칸의 대청, 2칸의 건넌방을 배치하였다. 건넌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두고, 뒤로는 반 칸 규모의 마루방과 화장실을 두었다.
<용인집 전경>
앞에 커다란 연못을 두고 뒤로는 울창하게 우거진 송림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다실은 원래 낙성대 내에 있던 강감찬 장군 유적지의 서당이었으나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조성 때 해체하여 1982년 이곳에 이건한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자형 평면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안방 옆으로 전면에 1.5칸의 방을 붙이고 후면으로 1칸의 부엌을 두었다. 동쪽으로는 1칸의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고, 건넌방 북쪽으로는 방바닥보다 1자 정도 높여 1칸 반의 내루를 만들어 돌출시켰다. 내루의 전면은 연못 속에 장주초석을 세우고 자리 잡고 있어 내루에 앉아 문을 열면 마치 물속에 떠 있는 기분을 들게 한다.
<다실 전경>
군산집은 궁집 영역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순조의 큰며느리 신정왕후의 친정집의 일부로서 1981년에 이곳에 이건한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좌우 대칭의 ‘⊔’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 날개쪽에 방과 부엌을 배치하였다.
<군산집 전경>
지난 4월에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무의자박물관 관장이자 무대미술가인 이병복 여사가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공연 및 작업 과정을 담은 사진자료를 비롯한 의상스케치·가면·미니어처 등 무대미술 자료, 세계무대미술경연대회(PQ) 관련 자료 등 2,500여점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에 기증하였다.
궁집은, 아니 무의자박물관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음악회,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지만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낡고 훼손된 고택을 보수하는데 여념이 없다. 고풍스런 문화공간으로 다시 우뚝 서게 될 그날을 기다려 본다.
(기자가 방문 당시 공사 중인 공간은 찍을 수 없어 문화재청 사진 3컷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