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에 자리 잡은 경주 양동 향단(慶州 良洞 香壇,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121-75, 보물 제412호)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선생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당시 1540년경에 지은 집으로, 어머니를 모시던 동생 이언괄(李彦适, 1494 ~1553)에게 지어준 살림집이다.
회재 선생은 성균관 유생인 여주이씨(驪州李氏) 이번(李蕃)과 경주손씨(慶州孫氏)의 아들로 외가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선생은 홍문관, 춘추관, 이조, 병조 등 청요직을 거치며 국가 민생을 염려하는 경세가로,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평소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숭상하는 선비정신에 투철하고 불의에 맞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선생은 1531년(중종 26)에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경주의 자옥산으로 들어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김안로의 패망으로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 회재 선생은 사림의 영수로 신망 받아 의정부 좌찬성에 발탁되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선생은 사람의 화를 줄이고자 고군분투하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향년 63세(1553년)로 일생을 마쳤다.

<경주 양동 향단 전경>
경주 양동마을은 ‘勿’자 형국으로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勿’자 형국의 가장 앞쪽 줄기 낮은 구릉에 위치한 향단은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한 눈에 들어온다.
전통 상류주택과는 다르게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특이한 평면 구성을 하고 있는 향단은 경사면을 그대로 이용해 지었다.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고, 뒤쪽에 정침공간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날개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전통 상류주택의 격식을 갖추면서도 집안 구조는 안채를 중심으로 격식을 과감히 탈피하기도 하였다.

<행랑채>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경사지를 이용해 4벌대 자연석 허튼쌓기를 한 기단 위에 ‘一’자형 행랑채와 마주하게 된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으로 왼쪽부터 마구간, 곳간, 방, 마루방, 중문, 방을 두었다. 오른쪽에 중문칸을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놓았지만 중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이 없어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다. 행랑채 오른쪽 협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행랑채와 정침 사이 공간>
행랑채 뒤편에 6벌대 막돌 허튼쌓기를 한 기단 위에 ‘口’자형 정침을 배치하였다. 정침은 가운데 작은 중정을 두고 안채, 사랑채, 아래채, 날개채가 붙어 있어 다소 폐쇄적이긴 하지만,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중문이 있고 건물과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출입하기에는 편리하다.

<사랑채>
마을을 향해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자리 잡은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一’자형 건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큰사랑과 작은사랑을 배치했다. 오른쪽에 위치한 큰사랑은 사랑마당 쪽으로 쪽마루를 두었으며, 작은사랑 앞으로는 툇마루와 난간을 두었다. 사랑 대청 뒤편은 툇마루를 두고 벽은 큰 바라지창을 내어 안채와 개방감이 있도록 설계했다.

<안채 중정>
사랑채 뒤편 중문을 통해 안채영역으로 들어선다. 정면 5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안채는 중정이 있는 쪽에 안방을 두고, 행랑채가 있는 방향으로 넓은 안대청과 상방을 배치했다. 난간을 갖춘 안대청은 행랑채 지붕선과 가까워 다소 폐쇄적이긴 하지만 아늑하고 조용해 안주인이 여가를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2개의 부엌은 안방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안채와 아래채 사이로 난 통로를 지나면 넓은 부엌영역이 나온다. 아래채와 연결된 서쪽 날개채는 아래층은 흙바닥에 기둥만 세워 개방되어 있고, 위층은 바닥은 마루를 깔고 난간은 살대를 꽂아 마무리한 다락이 있다. 오른쪽 2칸 규모의 큰 고방에는 음식을 준비하거나 저장할 수 있는 항아리를 두었고, 위층에는 부엌 살림살이나 음식을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부엌 중정>

<날개채>
아래채는 사랑채와 연결이 된 쪽에 마루를 설치하고 방과 마루방, 방이 연결되어 있으며 왼쪽 끝에는 고방을 두었다.
경주 양동 향단은 번성할 당시에는 99칸에 달하는 큰 규모의 조선 상류주택이었으며, 아쉽게도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56칸 정도 남아있지만 명가의 위엄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오늘도 향단은 오랜 세월 변함없이 물봉동산 산마루에서 아름다운 우리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에 자리 잡은 경주 양동 향단(慶州 良洞 香壇,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121-75, 보물 제412호)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선생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당시 1540년경에 지은 집으로, 어머니를 모시던 동생 이언괄(李彦适, 1494 ~1553)에게 지어준 살림집이다.
회재 선생은 성균관 유생인 여주이씨(驪州李氏) 이번(李蕃)과 경주손씨(慶州孫氏)의 아들로 외가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선생은 홍문관, 춘추관, 이조, 병조 등 청요직을 거치며 국가 민생을 염려하는 경세가로,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평소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숭상하는 선비정신에 투철하고 불의에 맞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선생은 1531년(중종 26)에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경주의 자옥산으로 들어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김안로의 패망으로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 회재 선생은 사림의 영수로 신망 받아 의정부 좌찬성에 발탁되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선생은 사람의 화를 줄이고자 고군분투하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향년 63세(1553년)로 일생을 마쳤다.
<경주 양동 향단 전경>
경주 양동마을은 ‘勿’자 형국으로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勿’자 형국의 가장 앞쪽 줄기 낮은 구릉에 위치한 향단은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한 눈에 들어온다.
전통 상류주택과는 다르게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특이한 평면 구성을 하고 있는 향단은 경사면을 그대로 이용해 지었다.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고, 뒤쪽에 정침공간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날개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전통 상류주택의 격식을 갖추면서도 집안 구조는 안채를 중심으로 격식을 과감히 탈피하기도 하였다.
<행랑채>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경사지를 이용해 4벌대 자연석 허튼쌓기를 한 기단 위에 ‘一’자형 행랑채와 마주하게 된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으로 왼쪽부터 마구간, 곳간, 방, 마루방, 중문, 방을 두었다. 오른쪽에 중문칸을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놓았지만 중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이 없어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다. 행랑채 오른쪽 협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행랑채와 정침 사이 공간>
행랑채 뒤편에 6벌대 막돌 허튼쌓기를 한 기단 위에 ‘口’자형 정침을 배치하였다. 정침은 가운데 작은 중정을 두고 안채, 사랑채, 아래채, 날개채가 붙어 있어 다소 폐쇄적이긴 하지만,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중문이 있고 건물과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출입하기에는 편리하다.
<사랑채>
마을을 향해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자리 잡은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一’자형 건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큰사랑과 작은사랑을 배치했다. 오른쪽에 위치한 큰사랑은 사랑마당 쪽으로 쪽마루를 두었으며, 작은사랑 앞으로는 툇마루와 난간을 두었다. 사랑 대청 뒤편은 툇마루를 두고 벽은 큰 바라지창을 내어 안채와 개방감이 있도록 설계했다.
<안채 중정>
사랑채 뒤편 중문을 통해 안채영역으로 들어선다. 정면 5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안채는 중정이 있는 쪽에 안방을 두고, 행랑채가 있는 방향으로 넓은 안대청과 상방을 배치했다. 난간을 갖춘 안대청은 행랑채 지붕선과 가까워 다소 폐쇄적이긴 하지만 아늑하고 조용해 안주인이 여가를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2개의 부엌은 안방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안채와 아래채 사이로 난 통로를 지나면 넓은 부엌영역이 나온다. 아래채와 연결된 서쪽 날개채는 아래층은 흙바닥에 기둥만 세워 개방되어 있고, 위층은 바닥은 마루를 깔고 난간은 살대를 꽂아 마무리한 다락이 있다. 오른쪽 2칸 규모의 큰 고방에는 음식을 준비하거나 저장할 수 있는 항아리를 두었고, 위층에는 부엌 살림살이나 음식을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부엌 중정>
<날개채>
아래채는 사랑채와 연결이 된 쪽에 마루를 설치하고 방과 마루방, 방이 연결되어 있으며 왼쪽 끝에는 고방을 두었다.
경주 양동 향단은 번성할 당시에는 99칸에 달하는 큰 규모의 조선 상류주택이었으며, 아쉽게도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56칸 정도 남아있지만 명가의 위엄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오늘도 향단은 오랜 세월 변함없이 물봉동산 산마루에서 아름다운 우리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