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창무극의 대가 고(故) 공옥진 선생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며 춤을 추고 싶다"

“공옥진이가 죽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또 오겠습니다”
2010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선 국립극장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에서 한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지난 7월 9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한 1인 창무극의 대가 고(故) 공옥진 선생. 무대에서 병신춤, 곱사춤, 원숭이춤 등 선생이 직접 창작한 춤에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곁들여 서민들의 슬픔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선생의 공연은 많은 이들을 웃기기도 울리기도 했다.
선생의 1인 창무극은 춤과 노래에 우리 특유의 흥과 한을 온몸으로 녹여내 무대 위에서 폭발해내는 다른 어떤 분야와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세계였다.
공옥진 여사는 1931년 판소리 명창 공대일 옹의 둘째 딸로 태어나 여덟살 때 부친이 일제에 징용되자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춤을 배웠다. 그로부터 7년 뒤, 부친을 다시 만나 부친과 성원목, 김연수, 임방울 등 명창들로부터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등을 사사 받았다. 1945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해 무용가의 길을 걸었으며, 1957년 임방울 창극단 협률사에 입단한 뒤 1960년까지 김연수 우리국악단, 김원술 안성국악단 등에서 활동하면서 ‘처녀별’ ‘바다로 가는 사람’ ‘동명성왕’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의 창극에서 주역으로 공연했다.
선생은 1973년 남도문화제를 계기로 ‘1인 창무극’을 창안하고 1978년 공간사랑 등 명무전 공연에서 판소리창과 독특한 표정의 병신춤이 곁들여지는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오만 가지 표정으로 몸을 꺾고 뒤트는 곱사춤, 문둥이춤, 앉은뱅이춤 등 기존 57가지에 이르는 종목을 비롯해 수많은 병신춤을 만들어냈고, 동물의 갖가지 모습을 춤으로 승화시켜냈다.

1990년대 미국 카네기홀과 링컨센터 무대까지 오를 정도로 1인 창무극으로 공연무대의 최고 스타였지만, 막상 선생의 삶은 기구하기만 했다. 장애인을 비하했다는 오해를 받아야했고, 끝없는 가난은 선생을 끝까 지 괴롭혔다. 그와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교통사고까지 겹쳐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는 등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 또, 선생의 춤이 전통을 계승한 춤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0년 5월에야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판소리 1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미 선생에게 춤을 배우던 제자들은 다 떠나고 단 한명의 제자만이 남아 선생의 옆을 지켰다.
“누구든 사랑한다 싶으면 떠나갔고 내 가슴엔 한만이 응어리졌다. 가난은 끊이지 않았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내 조카가 곱사였고 내 남동생이 벙어리였고 그리고 고통을 겪다 죽은 내 아들, 그리고 고생만 하는 내 딸,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했고 신들리게 했다. 춤을 안 추고는 도저히 배겨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없었다. 들썩거리며 춤을 추었다. 일부 계층만 생각하는 예술보다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예술이 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외받는 사람들을 항상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힘겹고 쓸쓸한 삶이었지만 선생에게는 춤이 있고 노래가 있어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소외받는 사람을 항상 생각하며 춤을 춘다는 선생의 말은 선생의 한평생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1인 창무극의 대가 고(故) 공옥진 선생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며 춤을 추고 싶다"
“공옥진이가 죽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또 오겠습니다”
2010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선 국립극장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에서 한 이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지난 7월 9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한 1인 창무극의 대가 고(故) 공옥진 선생. 무대에서 병신춤, 곱사춤, 원숭이춤 등 선생이 직접 창작한 춤에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곁들여 서민들의 슬픔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선생의 공연은 많은 이들을 웃기기도 울리기도 했다.
선생의 1인 창무극은 춤과 노래에 우리 특유의 흥과 한을 온몸으로 녹여내 무대 위에서 폭발해내는 다른 어떤 분야와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세계였다.
공옥진 여사는 1931년 판소리 명창 공대일 옹의 둘째 딸로 태어나 여덟살 때 부친이 일제에 징용되자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춤을 배웠다. 그로부터 7년 뒤, 부친을 다시 만나 부친과 성원목, 김연수, 임방울 등 명창들로부터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등을 사사 받았다. 1945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해 무용가의 길을 걸었으며, 1957년 임방울 창극단 협률사에 입단한 뒤 1960년까지 김연수 우리국악단, 김원술 안성국악단 등에서 활동하면서 ‘처녀별’ ‘바다로 가는 사람’ ‘동명성왕’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의 창극에서 주역으로 공연했다.
선생은 1973년 남도문화제를 계기로 ‘1인 창무극’을 창안하고 1978년 공간사랑 등 명무전 공연에서 판소리창과 독특한 표정의 병신춤이 곁들여지는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오만 가지 표정으로 몸을 꺾고 뒤트는 곱사춤, 문둥이춤, 앉은뱅이춤 등 기존 57가지에 이르는 종목을 비롯해 수많은 병신춤을 만들어냈고, 동물의 갖가지 모습을 춤으로 승화시켜냈다.
1990년대 미국 카네기홀과 링컨센터 무대까지 오를 정도로 1인 창무극으로 공연무대의 최고 스타였지만, 막상 선생의 삶은 기구하기만 했다. 장애인을 비하했다는 오해를 받아야했고, 끝없는 가난은 선생을 끝까 지 괴롭혔다. 그와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교통사고까지 겹쳐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는 등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 또, 선생의 춤이 전통을 계승한 춤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0년 5월에야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판소리 1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미 선생에게 춤을 배우던 제자들은 다 떠나고 단 한명의 제자만이 남아 선생의 옆을 지켰다.
“누구든 사랑한다 싶으면 떠나갔고 내 가슴엔 한만이 응어리졌다. 가난은 끊이지 않았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내 조카가 곱사였고 내 남동생이 벙어리였고 그리고 고통을 겪다 죽은 내 아들, 그리고 고생만 하는 내 딸,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했고 신들리게 했다. 춤을 안 추고는 도저히 배겨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없었다. 들썩거리며 춤을 추었다. 일부 계층만 생각하는 예술보다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예술이 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외받는 사람들을 항상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힘겹고 쓸쓸한 삶이었지만 선생에게는 춤이 있고 노래가 있어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소외받는 사람을 항상 생각하며 춤을 춘다는 선생의 말은 선생의 한평생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