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朝鮮王陵)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대한제국을 포함하여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오면서 27대에 걸쳐 왕과 왕비를 배출했다. 이들 조선의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의 무덤 42기를 ‘조선왕릉(朝鮮王陵)’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 왕세손,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자, 공주, 옹주, 후궁, 폐왕 등의 무덤을 일컫는다.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왕릉은 40기, 원은 14기이다.
조선왕릉의 터를 잡을 때에는 풍수상의 길지를 택하기 위해 신중을 다했다. 풍수에 밝은 지관이 몇 군데 후보지를 골라서 최종적으로는 임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터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시대 왕릉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로부터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겹 정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았으며,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을 마련하였다. 재실을 지나 숲길을 따라가면 물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만나고, 능역을 상징하는 홍살문을 통과하여 능역의 중심부로 접어들게 된다. 봉분 앞에는 다양한 석물과 문, 무석인 등의 기본적인 구성이 갖춰진다. 조선왕릉은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을 유지하면서 지형조건, 시대적 배경 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엄숙하고도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의미,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들은 각기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할 수 있다. 또란 왕릉 조영 절차를 포함한 모든 의례 절차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물들은 자체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앞으로 1대 태조 왕릉인 건원릉부터 마지막 27대 순종의 유릉까지 소개해 나갈 예정이다.
건원릉 (健元陵)
조선 시대 제1대 왕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은 동구릉(東九陵,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사적 제193호) 경내에 있다.

<억새가 자란 건원릉 사진제공=동구릉관리소>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구리 동구릉 건원릉 모습>
건원릉의 정면 멀리 떨어진 곳에 홍살문을 세웠는데, 이는 이곳부터 성스러운 장소이니 악구가 범접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왕의 능으로 오르는 길인 참도를 따라들어가면 정자각(丁字閣, 보물 제1741호)이 있고, 정자각 왼쪽으로 다른 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석물이 있다. 정자각 남쪽으로는 제사를 준비하는 3칸짜리 수복청이 있다. 그 옆에 용무늬 비 머리가 얹어진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九里 太祖 健元陵 神道碑, 보믈 제1803호))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건국 과정을 비롯하여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해 일대기를 새겨 넣은 이 신도비는 고려 시대 석비 조형을 탈피한 새로운 형식을 띠고 있다.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1408년(태종 8) 태조가 창덕궁에서 죽은 후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으로 정하게 되었다. 태조는 유언으로 조상이 묻혀있는 함흥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그의 아들 태종은 함흥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를 봉분 위에 덮었다.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왕을 지키는 영물인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4개씩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鼓)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석마(石馬)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건원릉은 왕릉의 형식은 조성이 가장 잘된 고려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으며, 조선 최초의 왕릉으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조선왕릉 (朝鮮王陵)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대한제국을 포함하여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오면서 27대에 걸쳐 왕과 왕비를 배출했다. 이들 조선의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의 무덤 42기를 ‘조선왕릉(朝鮮王陵)’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 왕세손,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자, 공주, 옹주, 후궁, 폐왕 등의 무덤을 일컫는다.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왕릉은 40기, 원은 14기이다.
조선왕릉의 터를 잡을 때에는 풍수상의 길지를 택하기 위해 신중을 다했다. 풍수에 밝은 지관이 몇 군데 후보지를 골라서 최종적으로는 임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터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시대 왕릉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로부터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겹 정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았으며,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을 마련하였다. 재실을 지나 숲길을 따라가면 물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만나고, 능역을 상징하는 홍살문을 통과하여 능역의 중심부로 접어들게 된다. 봉분 앞에는 다양한 석물과 문, 무석인 등의 기본적인 구성이 갖춰진다. 조선왕릉은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을 유지하면서 지형조건, 시대적 배경 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엄숙하고도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의미,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들은 각기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할 수 있다. 또란 왕릉 조영 절차를 포함한 모든 의례 절차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물들은 자체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앞으로 1대 태조 왕릉인 건원릉부터 마지막 27대 순종의 유릉까지 소개해 나갈 예정이다.
건원릉 (健元陵)
조선 시대 제1대 왕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은 동구릉(東九陵,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사적 제193호) 경내에 있다.
<억새가 자란 건원릉 사진제공=동구릉관리소>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구리 동구릉 건원릉 모습>
건원릉의 정면 멀리 떨어진 곳에 홍살문을 세웠는데, 이는 이곳부터 성스러운 장소이니 악구가 범접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왕의 능으로 오르는 길인 참도를 따라들어가면 정자각(丁字閣, 보물 제1741호)이 있고, 정자각 왼쪽으로 다른 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석물이 있다. 정자각 남쪽으로는 제사를 준비하는 3칸짜리 수복청이 있다. 그 옆에 용무늬 비 머리가 얹어진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九里 太祖 健元陵 神道碑, 보믈 제1803호))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건국 과정을 비롯하여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해 일대기를 새겨 넣은 이 신도비는 고려 시대 석비 조형을 탈피한 새로운 형식을 띠고 있다.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1408년(태종 8) 태조가 창덕궁에서 죽은 후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으로 정하게 되었다. 태조는 유언으로 조상이 묻혀있는 함흥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그의 아들 태종은 함흥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를 봉분 위에 덮었다.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왕을 지키는 영물인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4개씩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鼓)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석마(石馬)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건원릉은 왕릉의 형식은 조성이 가장 잘된 고려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으며, 조선 최초의 왕릉으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