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 자리 잡은 ‘서울 헌릉과 인릉(獻陵과 仁陵, 사적 제194호,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42)은 조선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 민 씨(元敬王后 閔 氏)의 능(쌍릉)과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와 순원숙황후 김 씨(純元肅皇后 金 氏)의 능(합장릉)이다.
<헌릉>
먼저, 헌릉(獻陵)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신의왕후 한 씨(神懿王后 韓 氏)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 ~1422, 재위 1400 ∼1418)과 원경왕후 민 씨(1365 ∼1420)의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석인·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 시대의 현릉·정릉, 조선 시대의 후릉과 같이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고 있어 조선 왕릉의 위엄과 웅장함이 잘 드러나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 정자각,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으며, 신도비각에는 1422년(세종 4)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 21)에 임진왜란으로 손상된 신도비 옆에 증설하여 세운 신도비가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는 소전대(燒錢臺)가 있는데, 이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조선 전기 태조의 건원릉, 신덕황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인 태종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창덕궁을 지었으며, 재위기간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권을 장악,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룩하여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인릉>
인릉(仁陵)은 제23대 순조(純祖, 1790 ~1834, 재위 1800∼1834)와 순원숙왕후 김씨(1789∼1857)의 능으로,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이다. 원래 인릉은 경기 파주에 있었는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1856년(철종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병풍석은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순조는 정조(正祖)와 수빈박씨(綏嬪朴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 씨(貞純王后 金 氏)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그 후 또다시 외척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로 사회가 혼란했다.
<헌인릉 오리나무 숲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헌릉과 인릉 아래에는 17,000여 평에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은 2005년에 서울시에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놓았다.
< 제2대 정종(定宗, 1357 ~1419, 재위 1398 ~1400)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인 후릉(厚陵)은 북한에 소재하고 있어서 다음에 소개하기로 합니다. >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 자리 잡은 ‘서울 헌릉과 인릉(獻陵과 仁陵, 사적 제194호,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42)은 조선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 민 씨(元敬王后 閔 氏)의 능(쌍릉)과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와 순원숙황후 김 씨(純元肅皇后 金 氏)의 능(합장릉)이다.
<헌릉>
먼저, 헌릉(獻陵)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신의왕후 한 씨(神懿王后 韓 氏)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 ~1422, 재위 1400 ∼1418)과 원경왕후 민 씨(1365 ∼1420)의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석인·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 시대의 현릉·정릉, 조선 시대의 후릉과 같이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고 있어 조선 왕릉의 위엄과 웅장함이 잘 드러나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 정자각,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으며, 신도비각에는 1422년(세종 4)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 21)에 임진왜란으로 손상된 신도비 옆에 증설하여 세운 신도비가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는 소전대(燒錢臺)가 있는데, 이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조선 전기 태조의 건원릉, 신덕황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인 태종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창덕궁을 지었으며, 재위기간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권을 장악,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룩하여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인릉>
인릉(仁陵)은 제23대 순조(純祖, 1790 ~1834, 재위 1800∼1834)와 순원숙왕후 김씨(1789∼1857)의 능으로,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이다. 원래 인릉은 경기 파주에 있었는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1856년(철종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병풍석은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순조는 정조(正祖)와 수빈박씨(綏嬪朴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 씨(貞純王后 金 氏)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그 후 또다시 외척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로 사회가 혼란했다.
<헌인릉 오리나무 숲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헌릉과 인릉 아래에는 17,000여 평에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은 2005년에 서울시에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놓았다.
< 제2대 정종(定宗, 1357 ~1419, 재위 1398 ~1400)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인 후릉(厚陵)은 북한에 소재하고 있어서 다음에 소개하기로 합니다. >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