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은 조선 6대 왕인 단종(端宗 1441-1457)의 무덤이다. 장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고, 능의 양식도 간단하고 석물도 단출하다. 명릉 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 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 단종역사관과 제실 등이 있다.

<영월 장릉>
단종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 씨(顯德王后 權 氏)의 아들로 태어나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3년 뒤인 1455년 첫째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쫓겨나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17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영월 장릉>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단종 사후 240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남양주 사릉 정자각>
남양주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 씨(定順王后 宋 氏, 1440∼1521)의 무덤이다. 정순왕후 송 씨는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대군부인의 예로 묘소를 조성하였다. 그 후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묘소를 다시 조성하였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석양과 석호를 하나씩 줄였으며, 무석인도 생략하였다.

<사릉 봉분 뒷편에서 본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문석인과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설치하였고, 드물게 예감 뚜껑(덮개)이 남아 있다.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아담한 모습이고,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향로와 어로는 중간에 끊어져 있다.
정순왕후 송 씨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했던 불운한 인물로 왕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자료제공=조선왕릉관리소, 문화재청
강원도 영월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은 조선 6대 왕인 단종(端宗 1441-1457)의 무덤이다. 장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고, 능의 양식도 간단하고 석물도 단출하다. 명릉 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 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 단종역사관과 제실 등이 있다.
<영월 장릉>
단종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 씨(顯德王后 權 氏)의 아들로 태어나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3년 뒤인 1455년 첫째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쫓겨나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17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영월 장릉>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단종 사후 240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남양주 사릉 정자각>
남양주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 씨(定順王后 宋 氏, 1440∼1521)의 무덤이다. 정순왕후 송 씨는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대군부인의 예로 묘소를 조성하였다. 그 후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묘소를 다시 조성하였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석양과 석호를 하나씩 줄였으며, 무석인도 생략하였다.
<사릉 봉분 뒷편에서 본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문석인과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설치하였고, 드물게 예감 뚜껑(덮개)이 남아 있다.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아담한 모습이고,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향로와 어로는 중간에 끊어져 있다.
정순왕후 송 씨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했던 불운한 인물로 왕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자료제공=조선왕릉관리소,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