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경주 독락당(慶州 獨樂堂)



獨   樂

離群誰與共吟壇 벗마저 떠났으니 누구와 함께 읊으리오

巖鳥溪魚慣我? 산새와 물고기 내 얼굴 반겨주네

欲識箇中奇絶處 그 중에 가장 빼어난 곳 어디에서 찾을 건가

子規聲裏月窺山 두견새 울어대고 밝은 달 솟아오르네

- 회재 선생의 林居十五詠 중 基 十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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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자계천에서 바라본 계정>


 조선 중기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은 성균관 유생인 여주이씨(驪州李氏) 이번(李蕃)과 경주손씨(慶州孫氏)의 아들로 외가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뛰어나고 포부가 원대했던 회재 선생은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 자랐으며 외삼촌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4~1529)의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선생은 홍문관, 춘추관, 시강원, 양사, 이조, 병조 등 청요직을 거치며 사환과 출세에 안주하지 않고, 국가 민생을 염려하는 경세가로, 또 이단을 배척하고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에 힘쓰는 유학자로서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평소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숭상하는 선비정신에 투철하고 불의에 맞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선생은 1531년(중종 26)에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경주의 자옥산으로 들어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김안로의 패망으로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 회재 선생은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 민생을 구하려는 우국애민의 충정으로 그 유명한 ‘一綱十目疏(일강십목소)’를 올려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제시하였다. 사림의 영수로 신망을 받으며 1545년 의정부 좌찬성에 발탁되었다. 하지만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선생은 다시 한 번 시련을 맞이하였다. 왕실의 두 외척인 대윤과 소윤 사이의 치열한 권력투쟁인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선생은 사람의 화를 줄이고자 고군분투하다 1547년(명종 2)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향년 63세(1553년)로 일생을 마쳤다. 
 유배지에서도 시련을 극복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구인록(求仁錄)》《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봉선잡의(奉先雜儀)》등 유학사에 빛나는 수많은 저서를 남긴 선생은 훗날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조선 시대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된 회재 선생은 세상을 떠난 지 13년 만에 사림의 신원운동으로 복작(復爵) 되었고, 2년 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동방오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했던가. 회재 선생의 강계 유배지엔 서자 잠계 이전인(潛溪 李全人, 1516~1568)이 아버지를 보필하며 늘 함께 있었다. 추운 겨울 아버지 시신을 대나무 상여에 싣고 와 고향땅에 묻어드리고, 아버지 학문을 세상에 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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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사랑채 독락당>


 자옥산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자계천 줄기에 자리 잡은 경주 독락당(慶州 獨樂堂, 보물 제413호,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300-3)은 41세의 혈기왕성했던 회재 선생이 파직되어 잠시 은둔하며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주변 경관이 수려해 학문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을 터. 회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그곳으로 들어간다. 사랑채인 옥산정사(玉山精舍) 독락당을 중심으로 안채 역락재(亦樂齋), 행랑채인 경청재(敬淸齋),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며 주인을 뒷바라지하던 별채 공수간, 사당, 어서각, 정자인 계정(溪亭)이 있고, 각 건물들은 담장을 둘러 폐쇄적이긴 하지만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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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행랑채와 솟을대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인 경청재 앞에 넓은 앞마당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 담장너머로 공수간이 보인다. 1601년에 지은 경청재는 회재 선생의 손자와 증손이 옥산별업(玉山別業)을 봉수하기 위해 세웠다. ‘ㅡ’자형 7칸 규모의 행랑채는 중문, 온돌방, 부엌과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이 있다. 행랑채와 연결된 중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문, 앞쪽은 막혀있는 담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오른쪽으로는 골목처럼 만들어진 담장 사이로 샛길이 나 있다. 휘어진 향나무를 그대로 둔 채 와편으로 쌓은 담장이 이색적이다. 이 샛길 끝나는 곳에 바로 자계천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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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안채전경>


 행랑채 뒤 작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역락재 안채는 1515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경주지방 상류주택의 유형을 따른 안채는 넓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면 7칸인 안채는 좌우로 날개채가 연결되어 있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과 연결된 왼쪽 날개채는 비교적 큰 부엌을, 오른쪽 날개채는 사랑채와 통하는 문간과 도장방을 두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장독대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안사랑격인 역락재가 자리 잡고 있다.

 

 다음은 사랑채로 들어선다. 오래된 향나무가 사랑채를 호위하듯 늠름하게 서 있다. 1516년(중종 11)에 지은 옥산정사 독락당은 여느 집 사랑채와는 다르게 기단도 낮고, 대청도 낮고, 집의 높이 또한 낮게 설계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ㅡ’자형 사랑채는 계곡을 향한 오른쪽은 팔작지붕으로, 안채와 연결된 왼쪽은 우진각지붕으로 지었다.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놓았으며, 왼쪽 1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었다. 독락당과 계곡 사이는 담장으로 외부 시선을 차단해 놓았지만 담장 한 부분에 살창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곳을 통해서 계곡에 흐르는 물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픈 회재 선생의 마음이 담긴 것 아닐까.
 독락당 오른쪽 담장을 돌아 일각문을 지나면 계정이 숨어 있다. 계정은 절반은 집 안쪽에, 절반은 숲 속에 있는 것처럼 너럭바위가 펼쳐진 아름다운 계곡과 숲은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마당과 거의 수평인 기단 위에 자리 잡은 ‘ㄱ’자형인 계정은 계곡을 향한 곳에 2칸 마루와 방 1칸이 있고, 방이 있는 쪽에 옆으로 2칸을 더 달아낸 ‘양진암(養眞菴)’이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계곡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이층 루와 같은 모습으로 자연과 하나가 된 듯 암반 위에 기둥을 세운 계정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곳에 오르면 세상의 모든 근심은 다 달아날 듯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지난 2010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독락당에는 여강이씨 옥산파 17세손 이해철 선생과 김춘란 여사 부부가 살고 있다. 어디를 가든 늘 함께 다니시는 금슬 좋은 잉꼬부부다. 운명에 이끌리 듯 결혼을 하셨다는 두 분의 환한 모습이 곧 독락당의 모습 같아 마음이 훈훈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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