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봉화 충재 종가(?齋 宗家)와 청암정(靑巖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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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봉화 충재 종가 전경>


<충재 종가 전경> 

 충재 권벌(沖齋 權?, 1478~1548) 선생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사빈(權士彬)과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 차남으로 태어나 10세에 문장의 이치를 깨닫고 댓구를 맞춰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명석했다.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禮曹參判)까지 올랐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중 14년(1519) 조광조의 혁신 정책에 불만을 품은 남곤·심정 등의 훈구파 재상들이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숙청한 사건)로 파직당해 어머니 묘소가 있는 유곡리 달실마을로 내려와 15년간 은거를 했다. 1533년 밀양부사로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乙巳士禍, 명종의 외척 윤원형 일파 소윤(小尹)이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들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가 일어나자 대궐에 들어가 혼자 계(啓)를 올려 윤임 일파를 구하려다 모든 직책에서 파면되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어 명종 2년(1547)에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정미사화라고도 부름)에 연루되어 삭주(朔州)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봉화 문수산 줄기가 남서쪽으로 뻗어 내리고, 낙동강 상류 내성천 지류가 합류하는 곳에 자리 잡은 달실마을은 금계포란(金鷄抱卵) 지형의 명당으로 조선 시대부터 삼남지방의 4대 길지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 마을은 충재 선생이 자리를 잡은 후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안동권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500년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봉화 충재 종가(奉花 沖齋 宗家)와 청암정(靑巖亭, 석천계곡과 함께 명승 제60호로 지정)을 찾아간다. 조선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 충재 종가는 마을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반듯하게 쌓은 돌담을 두른 종가는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채로 구성되어 있고, 담장 너머로 서재인 충재와 청암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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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솟을대문>


                                        <월문이라고도 부르는 솟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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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사랑채 전경>


<사랑채 전경>

 먼저 솟을대문 앞에 선다. ‘월문(月門)’으로도 불리는 솟을대문은 상하 인방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다. 대문채 양쪽에는 각각 방 1칸과 곳간을 배치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펼쳐져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조금은 폐쇄적인 ‘ㅁ’자 형태로 구성된 종가는 전면에 사랑채를, 후면에 안채를 배치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시야를 고려한 듯 사랑채 측면에서 1칸 정도 뒤로 물려서 설치를 했고, 중문과 연결해서 오른쪽에 안사랑을 두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ㅡ’자형 사랑채는 잘 다듬은 장대석 위에 사대부의 권위가 서린 듯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전면에 툇마루를 오른쪽에는 대청을, 왼쪽에는 방을 배치했다.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자형의 안채가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안방을, 왼쪽은 건넌방을 배치했으며 안방과 연결된 날개채 쪽에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 왼쪽 언덕 위에는 500년 동안 충재 선생의 불천위 제례(不遷位 祭禮)를 모시는 사당이 신문과 내삼문으로 겹겹이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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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청암정과 충재>


 <서재인 충재와 청암정>

 넓은 사당마당으로 지나면 담장 너머로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손꼽히는 청암정과 서재인 충재(沖齋)가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자신의 뜻을 실현하지 못한 충재 선생의 마음이 서려있는 듯 이곳으로 통하는 모든 문은 안에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장치했다. 청암정은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이곳에 머물 당시 큰아들 청암 권동보(靑巖 權東輔, 1517~1594)와 함께 지었다. 이 정자는 거북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사방의 시원스레 확 뚫린 6칸 규모의 넓은 대청과 2칸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루방 바깥쪽 3면은 난간을 두른 마루를 두었다. ‘丁’자형의 이 정자는 처음 지었을 때는 마루방 대신 구들이 깔려 온돌방이었고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온돌에 불을 지피자 바위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곳을 지나던 노승이 이 모습을 보고 거북의 등에 불을 지피면 거북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해 온돌을 들어내고 마루를 깔고 주변에 연못을 만들었더니 신기하게도 그 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정자, 돌다리를 건너 청암정으로 오르면 주변의 울창한 수목과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이곳은 수많은 선비들이 다녀간 듯 남명 조식이 쓴 ‘청암정(靑巖亭)’ 현판,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 퇴계 이황이 청암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탄하며 쓴 시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 등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도 그 명성이 자자해 누구나 화면을 통해 한번쯤은 봤을 터. ‘동이’ ‘스캔들’ ‘바람의 화원’ 등을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청암정 맞은편에는 충재 선생이 학문을 익히던 서재가 있다. 맞배지붕의 3칸 반규모의 아담하고 소박한 이 건물은 왼쪽부터 마루, 방, 부엌을 배치했으며, 특히 마루는 청암정을 바라볼 수 있는 쪽에 문을 달아 그 운치를 더했다.

 

 청암정 바로 옆에 충재 선생의 발자취와 안동권씨 가문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충재박물관이 있다. 전시공간과 수장고를 갖추고 있는 이 박물관은 2007년 개관했다. 이곳에는 《충재일기》(보물 제261호), 《근사록》(보물 제262호) 등을 비롯해 종가에서 소장해 온 482점의 보물과 후손들이 기증해 준 유물까지 총 10,000여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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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18대 종손 권종목 선생>


<18대손 권종목 선생> 

 500년 종가의 명맥을 이어온 종가에는 18대손 권종목(1943년생) 선생과 차종손 권용철 부부가 살고 있다. 권용철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종가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몇 십년 전만해도 대가족이 모여 살고, 일손이 넉넉해서 종손과 종부가 가문의 전통을 지키며 봉제례와 접빈객을 맞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지만 최근에는 연간 십만명 이상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변해 방문객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단순한 휴식공간이 아니라 문화유산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방문객을 위해 유료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우리 전통문화와 조상의 얼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좀 더 개발해 품격 높은 곳이 되도록 노력할 예정이라고 한다. 차종손으로서 종가문화를 지키려는 진정성 어린 결심이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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