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 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117호 한지장 장용훈



한지와 함께 한 60여 년의 세월, 후회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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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무형문화재 117호 한지장 장용훈>

 
‘천년을 사는 종이’라는 한지의 별명처럼 평생을 한지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신 중요무형문화재 117호 한지장 장용훈 선생. 약간은 싸늘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 오후 서울 통의동 사진 위주 전시장인 류가헌에서 열리는 「천년한지, 백년인연」이라는 전시회에서 만나 뵌 선생은 전시장 한쪽에서 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작업과 물질의 시연을 하고 계셨다. 몇 년 전 갑자기 병을 앓으시고 나서부터 귀가 잘 안 들리시고 거동하시는 것도 편치 않으신 선생. 하지만 종이 만드는 일을 하실 때만큼은 아직도 젊을 때 그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장용훈 선생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17살 때 처음으로 한지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100년 전 겨울 농한기 때 질 좋은 닥나무를 거둬 한지를 만들기 시작한 조부 장경순 선생과 아버지를 따라 한지를 만드는 일을 평생 업(業)으로 삼으신 부친 장세권 선생. 가업으로 한지를 만들었지만 부친 장세권 선생은 아들이 종이 만드는 일을 하지 않길 바라셨다. 하지만 운명이었나 보다. 선생은 종이 만드는 일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부친 장세권 선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좋아서 시작한 종이 만드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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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공문서 복원 사업으로 한지 수요가 폭발하면서 소위 말해 돈을 쓸어 담았다. 하지만 전쟁과 그 이후 불안한 정세에 선생이 살던 마을은 안전하지 못했고, 벌어들인 돈을 은행에 맡길 수도 없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지가 보급이 되어 한지의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하고 한지 만드는 일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떠났지만 선생은 이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이유가 없어요. 그냥 한지가 좋았어요.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우리 아버지께서도 종이밖에 남길게 없으니 가업으로 이어나갔음 좋겠다라며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 후 선생은 경제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냈다. 1970년 선생은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털어 닥나무 품질이 좋은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가평에 공장을 세우고 몇 년 후 홍수가 나 공장 지붕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종이며 닥나무며 전부 썩고 없어졌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선생은 포기 하지 않았다. 그렇게 종이가 좋았던 것이다.
그 후 선생의 아들들이 선생과 길을 함께 했다. 정말 힘들었지만 선생은 아들들과 함께 종이에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수요가 많지는 않았지만 정성들여 만든 한지는 시간이 지나자 빛을 보기 시작했다. 국내외의 서예가와 화가들이 선생의 작품을 찾았고 작품 전시도 하였다.
한지에 바쳐온 평생 세월. 선생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냥 종이가 좋아 한 평생을 바쳐온 일이고 이제 많은 이들이 우리 한지를 다시 찾아줘서 고맙단다.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필자가 나서는 문 밖까지 따라 나오시며 귤 한 개를 쥐어 주신다.
  “고마워요. 우리 전통 한지를 찾아 주셔서…….”라며 환하게 웃으시는 선생의 모습은 은은한 한지의 아름다움을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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