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기(甕器)는 질그릇(진흙만으로 반죽해 잿물(柚藥)을 입히지 않고 번조(燔造)하여 광택이 없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번조하여 광택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며, 옹기장(甕器匠)은 이러한 옹기를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옹기는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제기, 식기, 솥 등으로 광범위하게 애용해왔다. 문헌에서 ‘옹(瓮)’이라는 말은 《삼국유사》 ‘기이편’ 혜공왕조에 “천구성이 동루 남쪽에 떨어졌는데, 그 머리가 독처럼 생겼고”라는 내용에서 처음 언급된다. 이 글에서는 그릇으로서의 옹기가 아닌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의 크기를 옹기에 비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옹기 생산을 담당하는 와기전(瓦器典)이라는 기관을 두었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100여 명의 옹기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옹기는 용도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지역마다 이름도 달리 불린다. 기형에 따라서는 옹(甕)·항(缸)·호(壺)·병(甁) 등으로 분류된다. 중배가 부르며 키가 큰 것은 ‘대옹’ ‘큰독’이라고 부르고, ‘항아리’는 옹보다 작은 크기로 위아래가 좁고 배가 부른 형태를 말한다. 독보다 조금 작고 배가 부른 것은 ‘중두리’, 중두리보다 배가 부르고 키가 작은 것은 ‘바탱이’라 부르며, 독의 뚜껑으로는 ‘소래기’ ‘자배기’ ‘버치’ 등이 있고, 물을 담아 두거나 옮기는 용도로는 ‘두멍’ ‘동이’ ‘옹자배기’ ‘푼주’ ‘소라’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생활용기인 ‘양념단지’ ‘소줏고리’ ‘시루’ ‘장군’ ‘떡살’ ‘뚝배기’ 등도 옹기로 만들어져 사용됐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실용적인 그릇이었던 옹기는 쓰임새를 정해놓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주거공간의 배치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됐다.
옹기점(甕器店, 옹기장이 활동하는 곳)의 시설로는 수비장, 움, 물레, 송침, 찬간, 가마 등이 필요하며 가마의 형태는 경사진 곳에 길게 비스듬히 축조한 등요가 일반적이다. 옹기제작은 질 좋은 점토를 채취하는 일부터 시작하며, 채취된 점토를 숙성시켜 반죽하고 옹기를 성형하기 위해 흙을 가래떡 모양으로 만든다. 대부분의 옹기는 밑에서부터 위로 쌓아 올라가며 제작한다. 바닥을 만들고 이후 타림질, 수레질, 근개질 과정을 거쳐 몸체를 만들고 옹기 아가리 부분의 테두리를 만들어 옹기 형태를 완성한다. 옹기 성형이 끝나면 건조와 유약을 입히는 시유를 한다. 이 과정을 ‘잿물을 입힌다’라고 표현한다. 건조는 시유 전과 시유 후 두 번 이뤄지며 건조된 옹기는 가마에 넣어 소성과정을 거쳐 완성한다. 이렇게 옹기를 한번 제작하는 데에는 40여 일이 소요된다.
1960년대 후반에만 해도 전국 곳곳에 약 500여 곳에 이르는 옹기점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식기재료의 발달과 주택의 현대화 등으로 인해 옹기수요가 점차 줄어 옹기점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옹기장은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됐다. 이때 故 이내원 선생, 故 이옥동 선생, 故 이종각 선생이 초대 보유자로 인정됐고, 이후 2010년 김일만 선생과 정윤석 선생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됐다. 김일만 선생은 5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옹기 제작을 해오던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아 옹기 일을 배웠다. 경제적인 것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현재 4명의 아들과 함께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다. 정윤석 선생은 옹기로 유명했던 마을인 전남 강진 봉황마을에서 외숙부였던 이동근 선생으로부터 전라도 옹기제작 전통기법인 쳇바퀴 타래 기법을 배웠다. 하지만 막내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선생의 옹기점이 옹기로 유명했던 마을이었던 이곳에 현재 유일하게 남은 옹기점이 되었다.

<김일만 선생>

<정윤석 선생>
옹기(甕器)는 질그릇(진흙만으로 반죽해 잿물(柚藥)을 입히지 않고 번조(燔造)하여 광택이 없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번조하여 광택이 나고 단단한 그릇)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며, 옹기장(甕器匠)은 이러한 옹기를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옹기는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제기, 식기, 솥 등으로 광범위하게 애용해왔다. 문헌에서 ‘옹(瓮)’이라는 말은 《삼국유사》 ‘기이편’ 혜공왕조에 “천구성이 동루 남쪽에 떨어졌는데, 그 머리가 독처럼 생겼고”라는 내용에서 처음 언급된다. 이 글에서는 그릇으로서의 옹기가 아닌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의 크기를 옹기에 비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옹기 생산을 담당하는 와기전(瓦器典)이라는 기관을 두었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100여 명의 옹기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옹기는 용도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지역마다 이름도 달리 불린다. 기형에 따라서는 옹(甕)·항(缸)·호(壺)·병(甁) 등으로 분류된다. 중배가 부르며 키가 큰 것은 ‘대옹’ ‘큰독’이라고 부르고, ‘항아리’는 옹보다 작은 크기로 위아래가 좁고 배가 부른 형태를 말한다. 독보다 조금 작고 배가 부른 것은 ‘중두리’, 중두리보다 배가 부르고 키가 작은 것은 ‘바탱이’라 부르며, 독의 뚜껑으로는 ‘소래기’ ‘자배기’ ‘버치’ 등이 있고, 물을 담아 두거나 옮기는 용도로는 ‘두멍’ ‘동이’ ‘옹자배기’ ‘푼주’ ‘소라’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생활용기인 ‘양념단지’ ‘소줏고리’ ‘시루’ ‘장군’ ‘떡살’ ‘뚝배기’ 등도 옹기로 만들어져 사용됐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실용적인 그릇이었던 옹기는 쓰임새를 정해놓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주거공간의 배치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됐다.
옹기점(甕器店, 옹기장이 활동하는 곳)의 시설로는 수비장, 움, 물레, 송침, 찬간, 가마 등이 필요하며 가마의 형태는 경사진 곳에 길게 비스듬히 축조한 등요가 일반적이다. 옹기제작은 질 좋은 점토를 채취하는 일부터 시작하며, 채취된 점토를 숙성시켜 반죽하고 옹기를 성형하기 위해 흙을 가래떡 모양으로 만든다. 대부분의 옹기는 밑에서부터 위로 쌓아 올라가며 제작한다. 바닥을 만들고 이후 타림질, 수레질, 근개질 과정을 거쳐 몸체를 만들고 옹기 아가리 부분의 테두리를 만들어 옹기 형태를 완성한다. 옹기 성형이 끝나면 건조와 유약을 입히는 시유를 한다. 이 과정을 ‘잿물을 입힌다’라고 표현한다. 건조는 시유 전과 시유 후 두 번 이뤄지며 건조된 옹기는 가마에 넣어 소성과정을 거쳐 완성한다. 이렇게 옹기를 한번 제작하는 데에는 40여 일이 소요된다.
1960년대 후반에만 해도 전국 곳곳에 약 500여 곳에 이르는 옹기점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식기재료의 발달과 주택의 현대화 등으로 인해 옹기수요가 점차 줄어 옹기점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옹기장은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됐다. 이때 故 이내원 선생, 故 이옥동 선생, 故 이종각 선생이 초대 보유자로 인정됐고, 이후 2010년 김일만 선생과 정윤석 선생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됐다. 김일만 선생은 5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옹기 제작을 해오던 집안의 가업을 이어받아 옹기 일을 배웠다. 경제적인 것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현재 4명의 아들과 함께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다. 정윤석 선생은 옹기로 유명했던 마을인 전남 강진 봉황마을에서 외숙부였던 이동근 선생으로부터 전라도 옹기제작 전통기법인 쳇바퀴 타래 기법을 배웠다. 하지만 막내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선생의 옹기점이 옹기로 유명했던 마을이었던 이곳에 현재 유일하게 남은 옹기점이 되었다.
<김일만 선생>
<정윤석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