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보은 최태하 가옥 (報恩 崔台夏 家屋)



<사랑채와대문채>


 보은 금적산 아래 자리 잡은 선곡(仙谷)마을은 화순최씨(和順崔氏) 집성촌으로 조선 시대 계당 최홍림(溪堂 崔洪霖, 1508~1581)이 을사사화(乙巳士禍, 1548년)를 피해 은둔생활을 하면서 계당을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낸 유서 깊은 곳이다. 흔히 ‘선우실’이라고도 부르는 선곡마을은 학이 알을 품는 지형이라 하여 마을에 무거운 것을 올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의 조상묘지에는 무거운 상석 및 비석도 없고, 집도 사랑채만 기와로 올리고 안채는 초가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보은 최태하 가옥(報恩 崔台夏 家屋, 충북 보은군 삼승면 거현송죽로 301-7, 중요민속문화재 제139호)을 찾아간다. 담 너머로 들리는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에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주말이면 언제나 최재덕(1948년생) 선생 부부가 서울에서 내려와 할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집 안팎을 가꾸고 계신다. 당시 근검절약을 하며 재산을 많이 모으신 선생의 고조부 최봉진 씨가 이 집을 사서 이사를 오셨고, 증조부 최익수 씨가 안채를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우실에서 흔히 이 집을 ‘감찰댁’이라고 부르는 것도 선생의 증조부께서 고종 때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을 지냈던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할머니 순천김씨(順天金氏) 김선묵 씨는 할아버지 최택근 씨가 일찍 돌아가셔서 청상이 되셨다. 그래서 넷째 할아버지 최충근 씨의 둘째 아들인 최태하 씨를 양자로 들이셨고, 태어난 지 100일 만에 큰댁으로 양자를 온 최태하 씨는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 청주시장까지 역임하셨다. 최태하 씨의 둘째 아들이 바로 최재덕 선생이 되신다. 최재덕 선생은 청주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 선우실 할머니 댁으로 들어와 일곱 살 때까지 살았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이곳을 떠났지만 방학 때마다 할머니 댁으로 들어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보은 최태하 가옥은 흙과 돌을 섞어가며 쌓은 담장이 전체 가옥을 둘러싸고 있다. 동쪽으로 낸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솟을대문, 그 왼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앞에는 수목이 식재되어 있는 사랑마당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는 직각 축으로 중문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문채와 사랑채의 사이에는 담이 둘러져 있어 안마당과의 경계가 되고 있다. 중문간채의 중앙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로 넓은 안마당이고, 정면에 안채가 중문채와 같은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모든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별도로 각각 떨어져 배치되어 있다.

 

 솟을대문과 나란히 서 있는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의 ‘ㅡ’자 형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좌우에 큰사랑과 작은 사랑을 두었다. 오른쪽 반 칸 뒤편은 아궁이 시설을 두고, 앞은 토벽으로 막아 벽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사랑채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으며 대청은 분합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했다. 담장이 둘러진 사랑마당에는 2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회화나무가 긴 세월 고택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1983년 사랑채 서까래가 썩고 많이 훼손되어 최태하 씨가 보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보수 시 대들보 상량함에서 ‘숭정 기원후 임술’이라고 쓴 한지가 나왔는데 이것으로 보면 사랑채는 1682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사랑채와 안채의 마루나 기둥 모서리가 닳은 정도를 비교해 봐도 사랑채가 훨씬 더 오래된 건물이란 것을 알 수 있지만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안채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려면 중문채를 지나야 한다. 중문간채는 사랑채와 안마당 사이로 낸 ‘ㄱ’자로 담과 연결되어 있다. 중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ㅡ’자 형으로 가운데 대문을 두고 좌우에 방과 부엌, 광을 두었다.


<안채누상마루>


 중문간채 문을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을 둔 안채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ㅡ’자 형으로 가운데 대청을 두고 왼쪽은 부엌과 안방을, 오른쪽은 건넌방을 두었다. 상량문에 고종 29년(1892)에 지었다는 건립연도가 정확히 기록된 안채는 초가이지만 세부기법이나 건축구조에 있어 매우 뛰어난 건물이다. 1970년대 주택 지붕개량사업으로 기와를 올리기도 했지만 다시 초가를 올렸다. 방과 대청 앞으로는 툇마루를 두어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으며, 방 뒤편으로는 골방을 두고 있다. 그리고 대청 뒤편은 툇마루를 설치하고 그 중 한 칸은 벽으로 막아 정실(淨室)을 만들어 조상의 위패를 모셨다. 건넌방은 앞쪽으로 함실아궁이가 있어 툇마루가 대청보다 높은 누상마루로 되어 있다.


<곳간>


 그 밖에도 안채 주위에 초가로 된 크고 작은 곳간채가 5채나 있다. 안채 뒷마당에는 벼를 저장하던 1칸 규모의 고상식 곳간이 2채 있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 3칸 규모의 광으로 쓰이던 곳간채가 있다. 안채와 중문간채 사이에는 방앗간과 광으로 쓰이던 2칸 규모의 곳간채 2동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최재덕선생>


 머슴으로, 마님으로 결혼생활 36년을 함께 해온 최재덕·손미자 부부와 마주했다. 함께 한 세월만큼 온화한 두 분의 모습은 무척 닮았다. 두 분은 2009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점점 훼손되는 고향집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주말이면 내려오신다. 숙명인지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도 해야 되는 일이기에 묵묵히 지키고 계신다. 정성들여 쓸고 닦고 관리하면서 문화재를 보는 안목도 달라졌다고 하신다. 선생은 “고택문화재는 당시의 건축문화와 집주인의 안목과 재화 등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소중한 유산인데 정확한 고증을 통해 제대로 복원하고 수리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리고 지자체의 무관심, 무책임, 건축 보수 관리의 잘못된 제도 등 바로잡아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소유자 역시 스스로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지키고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원장님으로, 주말에는 보은 고향집 관리인으로 선생의 행복한 이중생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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