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담길>
성주 한개마을(星州 한개마을,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은 560년 성산이씨(星山李氏)가 모여 사는 전통 깊은 씨족마을이다. 한개마을은 영취산(靈鷲山)이 마을을 감싸며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있고, 앞쪽으로는 이천(伊川)과 백천(白川)이 합쳐 흐르는 영남 제일의 길지이다. 한개마을의 ‘한개’는 ‘큰 나루’라는 뜻으로 옛날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나룻배가 이 마을 앞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한개마을은 1450년 경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처음 자리를 잡고, 그의 6대손 월봉 이정현(月峰 李廷賢, 1587~1612)이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내력 깊은 이 마을에서는 사도세자의 호위무사를 지낸 돈재 이석문(遯齋 李碩文, 1713~1773), 돈재공의 증손으로 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1792~1871), 후기 성리학자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5) 등 이름난 선비와 학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이 마을은 경사진 지형을 따라 크게 두 갈래길을 중심으로 집들이 배치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성주 대산리 진사댁(星州 大山里 進士宅, 경북민속문화재 제124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0)을 지나면 구불구불 흙돌담으로 이어지는 고샅길을 따라 오른쪽은 성주 대산리 하회댁(星州 大山里 河回宅, 경북민속문화재 제176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37), 대산동 한주 종택(大山洞 寒洲 宗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5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43)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경사진 언덕 위에 대산동 교리댁(大山洞 校理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3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2), 성주 응와 종택(星州 凝窩 宗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4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6)이 차례로 있고, 맨 위에 대산동 월곡댁(大山洞 月谷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6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20)이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월봉정(月峰亭), 첨경재(瞻敬齋) 등 재실이 5동 남아있다. 한개마을 대부분의 건축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으나, 전체적인 마을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도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등이 대지의 지형에 따라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북비문>
마을 서쪽으로 난 안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 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성주 응와 종택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북비공’으로 더 잘 알려진 돈재 이석문(遯齋 李碩文, 1713~1773)이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던 곳이다. 돈재공은 영조 15년(1739)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훈련원주부 등의 벼슬을 지냈다. 특히 당시 사도세자의 호위무사로 있던 돈재공은 1762년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세손을 등에 업고 어전으로 들어가 부당함을 간하다가 파직되어 낙향해 사도세자를 향한 사모의 정과 안녕을 기원하며 대문을 북쪽으로 내고 매일같이 북쪽을 향해 예를 갖췄다. 훗날 영조가 벼슬을 내렸지만 나가지 않았으며, 사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쪽에 ‘북비(北扉)’라고 적힌 일각문이 있다. 북비문을 들어서면 꼿꼿한 선비정신이 느껴지는 북비 고택이 있다. 정면 4칸 규모의 ‘ㅡ’자형 북비 고택은 담 너머 응와 종택에 비하면 다소 소박하게 보이지만 사도세자를 향한 돈재공의 굳은 절의가 담겨져 있다.

<응와종택사랑채>
응와 종택은 돈재공의 손자 이규진(李奎鎭)이 순조 21년(1821)에 정침을 중건하고, 공조판서를 지낸 그의 아들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1792~1871)가 고종 3년(1866)에 기존 건물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ㄱ’자형 사랑채는 오른쪽부터 대청과 사랑방을, 왼쪽으로 누마루를 두었다. 특히 부채살 모양의 선자연이 그대로 드러난 대청과 각 실마다 집 주인의 멋과 품격, 철학이 담긴 ‘경침(警枕)’ ‘사미당(四美堂)’ 등의 편액을 걸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눈길을 머물게 한다. 사랑마당을 지나 안채 영역으로 들어가면 넓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6칸 규모의 ‘ㅡ’자형 안채와 곳간채가 자리 잡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안방과 부엌을 배치하고, 왼쪽에는 건넌방을 두었다. 솟을대문은 대문을 중심으로 곳간과 방을 1칸씩 좌우에 배치하고, 대문 좌측에는 하인이나 청지기가 출입하는 협문을 별도로 두었다. 그밖에도 장판각과 안대문채, 아래채, 마방 등이 있었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한주정사>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집, ‘동곽댁’이라고도 불리는 대산동 한주 종택으로 오른다. 마을 오른쪽 가장 위에 있다. 이 마을에서 고택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집으로, 영조 43년(1767) 이민검(李敏儉)이 처음 지었고, 고종 3년(1866)에 한주 이진상이 고쳐지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일곽(一郭)과 ‘한주정사(寒洲精舍)’라 불리는 정자가 있는 일곽으로 나눠져 있다. 경사진 지형 탓으로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한 안채는 정면 6칸 반, 측면 1칸 반 규모의 ‘ㅡ’자형 건물로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부엌을, 방을 두었다. 안채 왼쪽에는 3칸 규모의 곳간채가, 오른쪽에는 3칸 규모의 아래채가 있고, 안채 정면으로는 사랑채와 연결된 7칸 규모의 중대문채를 배치했다.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은 정면 4칸 반 규모의 ‘ㅡ’자형 사랑채는 오른쪽부터 대청, 작은사랑방, 큰사랑방을 배치했다. 방 뒤쪽에 골방을 두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전면은 툇마루로 연결했다. 평대문을 단 3칸 대문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한쪽은 청지기방을, 다른 한쪽은 광을 두었다. 한주정사는 정면 4칸, 측면 3칸 반 규모의 ‘T’자형 정자로, 노송과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것 같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방을 배치했는데 오른쪽 방은 뒤로 1칸 반을 달아내고 앞쪽으로 누마루를 1칸 돌출시켰다. 정자 오른쪽에 연못을 만들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을 거쳐서 나가도록 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돌담으로 이어진 고샅길을 따라 걷다보면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잠시 멈춰 열려있는 대문 사이를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반갑게 눈인사를 건네주는 어른이라도 계시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선조들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보는 행운도 생긴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겨운 풍경과 푸근한 인심이 살아있는 전통마을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곳으로.
<돌담길>
성주 한개마을(星州 한개마을,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은 560년 성산이씨(星山李氏)가 모여 사는 전통 깊은 씨족마을이다. 한개마을은 영취산(靈鷲山)이 마을을 감싸며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있고, 앞쪽으로는 이천(伊川)과 백천(白川)이 합쳐 흐르는 영남 제일의 길지이다. 한개마을의 ‘한개’는 ‘큰 나루’라는 뜻으로 옛날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나룻배가 이 마을 앞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한개마을은 1450년 경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처음 자리를 잡고, 그의 6대손 월봉 이정현(月峰 李廷賢, 1587~1612)이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내력 깊은 이 마을에서는 사도세자의 호위무사를 지낸 돈재 이석문(遯齋 李碩文, 1713~1773), 돈재공의 증손으로 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1792~1871), 후기 성리학자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5) 등 이름난 선비와 학자들도 많이 배출했다.
이 마을은 경사진 지형을 따라 크게 두 갈래길을 중심으로 집들이 배치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성주 대산리 진사댁(星州 大山里 進士宅, 경북민속문화재 제124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0)을 지나면 구불구불 흙돌담으로 이어지는 고샅길을 따라 오른쪽은 성주 대산리 하회댁(星州 大山里 河回宅, 경북민속문화재 제176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37), 대산동 한주 종택(大山洞 寒洲 宗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5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43)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경사진 언덕 위에 대산동 교리댁(大山洞 校理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3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2), 성주 응와 종택(星州 凝窩 宗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4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6)이 차례로 있고, 맨 위에 대산동 월곡댁(大山洞 月谷宅, 경북민속문화재 제46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20)이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월봉정(月峰亭), 첨경재(瞻敬齋) 등 재실이 5동 남아있다. 한개마을 대부분의 건축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으나, 전체적인 마을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도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등이 대지의 지형에 따라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북비문>
마을 서쪽으로 난 안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 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성주 응와 종택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북비공’으로 더 잘 알려진 돈재 이석문(遯齋 李碩文, 1713~1773)이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은거하며 살았던 곳이다. 돈재공은 영조 15년(1739)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훈련원주부 등의 벼슬을 지냈다. 특히 당시 사도세자의 호위무사로 있던 돈재공은 1762년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세손을 등에 업고 어전으로 들어가 부당함을 간하다가 파직되어 낙향해 사도세자를 향한 사모의 정과 안녕을 기원하며 대문을 북쪽으로 내고 매일같이 북쪽을 향해 예를 갖췄다. 훗날 영조가 벼슬을 내렸지만 나가지 않았으며, 사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쪽에 ‘북비(北扉)’라고 적힌 일각문이 있다. 북비문을 들어서면 꼿꼿한 선비정신이 느껴지는 북비 고택이 있다. 정면 4칸 규모의 ‘ㅡ’자형 북비 고택은 담 너머 응와 종택에 비하면 다소 소박하게 보이지만 사도세자를 향한 돈재공의 굳은 절의가 담겨져 있다.
<응와종택사랑채>
응와 종택은 돈재공의 손자 이규진(李奎鎭)이 순조 21년(1821)에 정침을 중건하고, 공조판서를 지낸 그의 아들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1792~1871)가 고종 3년(1866)에 기존 건물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ㄱ’자형 사랑채는 오른쪽부터 대청과 사랑방을, 왼쪽으로 누마루를 두었다. 특히 부채살 모양의 선자연이 그대로 드러난 대청과 각 실마다 집 주인의 멋과 품격, 철학이 담긴 ‘경침(警枕)’ ‘사미당(四美堂)’ 등의 편액을 걸어 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눈길을 머물게 한다. 사랑마당을 지나 안채 영역으로 들어가면 넓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6칸 규모의 ‘ㅡ’자형 안채와 곳간채가 자리 잡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안방과 부엌을 배치하고, 왼쪽에는 건넌방을 두었다. 솟을대문은 대문을 중심으로 곳간과 방을 1칸씩 좌우에 배치하고, 대문 좌측에는 하인이나 청지기가 출입하는 협문을 별도로 두었다. 그밖에도 장판각과 안대문채, 아래채, 마방 등이 있었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한주정사>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집, ‘동곽댁’이라고도 불리는 대산동 한주 종택으로 오른다. 마을 오른쪽 가장 위에 있다. 이 마을에서 고택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집으로, 영조 43년(1767) 이민검(李敏儉)이 처음 지었고, 고종 3년(1866)에 한주 이진상이 고쳐지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일곽(一郭)과 ‘한주정사(寒洲精舍)’라 불리는 정자가 있는 일곽으로 나눠져 있다. 경사진 지형 탓으로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한 안채는 정면 6칸 반, 측면 1칸 반 규모의 ‘ㅡ’자형 건물로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부엌을, 방을 두었다. 안채 왼쪽에는 3칸 규모의 곳간채가, 오른쪽에는 3칸 규모의 아래채가 있고, 안채 정면으로는 사랑채와 연결된 7칸 규모의 중대문채를 배치했다.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은 정면 4칸 반 규모의 ‘ㅡ’자형 사랑채는 오른쪽부터 대청, 작은사랑방, 큰사랑방을 배치했다. 방 뒤쪽에 골방을 두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전면은 툇마루로 연결했다. 평대문을 단 3칸 대문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한쪽은 청지기방을, 다른 한쪽은 광을 두었다. 한주정사는 정면 4칸, 측면 3칸 반 규모의 ‘T’자형 정자로, 노송과 어우러진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것 같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방을 배치했는데 오른쪽 방은 뒤로 1칸 반을 달아내고 앞쪽으로 누마루를 1칸 돌출시켰다. 정자 오른쪽에 연못을 만들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을 거쳐서 나가도록 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돌담으로 이어진 고샅길을 따라 걷다보면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잠시 멈춰 열려있는 대문 사이를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반갑게 눈인사를 건네주는 어른이라도 계시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선조들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보는 행운도 생긴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겨운 풍경과 푸근한 인심이 살아있는 전통마을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