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장
대나무에 그려 넣은 예술 낙죽
낙죽(烙竹)이란 인두로 대나무 겉면을 지져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과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나 이를 통해 만들어진 대나무 공예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고, 낙죽장(烙竹匠) 은 이러한 기능 또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대나무와 죽세공품으로 유명한 전남 담양 지역에서 성행했다.
낙죽의 시초나 발달과정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유물이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에도 일반 생활필수품의 수요에 따라 낙인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경국대전》에서 명시한 경공장(京工匠)이나 외공장(外工匠)에도 낙죽장은 포함돼 있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다만 19세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순조 말에 박창규라는 사람이 낙화를 잘한다”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어 박창규에 의해 일제강점기까지 이 기술이 전승됐을 것으로 보인다.
낙죽은 온도를 맞춰 그려야 하고 인두가 식기 전에 한 무늬나 글씨를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에 작업 경험과 빠른 속도의 인두질, 정확한 묘사력을 필요로 한다. 주로 화살대나 침통, 칼자루, 병풍, 담뱃대, 부채, 대나무 필통, 참빗, 죽장(竹杖) 등에 작업을 하고, 특히 합죽선(合竹扇)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 쓰이는 두꺼운 대나무 살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낙죽을 할 때 새기는 무늬로는 소라문, 산수문, 뇌문, 운문, 귀갑문, 매화나 국화 등 사군자문, 십장생문, 박쥐문, 연화문, 운문(雲文) 등이 있으며 세필의 숱한 글자를 써넣기도 한다.

낙죽하는 작업을 ‘낙(烙) 놓는다’ ‘낙질한다’ ‘낙지한다’라고 하는데 이때 쓰이는 도구는 인두와 화로 뿐이다. 인두는 바느질 인두와는 형태가 다르게 호미처럼 ‘ㄱ’자 모양으로 안으로 굽은 형태로 되어있다. 몸체는 앵무새부리처럼 두툼하게 둥글지만 끝은 뾰족하다.
낙죽을 하기 위해서는 열기를 유지하기 위해 인두 두 개를 준비해 화로에 꽂아두고 번갈아 사용한다. 먼저 인두의 끝을 숯불에 가열시키고 멍석에 달궈진 숯을 문지르고 불 근처에 갖다 대 열도를 가늠한 후 낙죽을 하기 시작한다. 검정색은 인두 끝의 열이 높을 때 표현되고, 다갈색은 인두 끝의 열이 낮을 때 표현된다. 이 때 알맞게 뜨겁도록 하고, 알맞게 뜨거워진 인두를 사용해 작업을 해야하는데 숙련된 기술과 오랜 경험을 요한다.
낙죽장은 1961년 11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됐다. 초대 기능보유자는 담양에서 근세 낙죽의 명인이라 불리던 김원형 선생에게 낙죽을 배운 이동련 선생이 인정됐으며 김원형 선생의 아들 김양언 선생과 국양문 선생이 뒤를 이었고재는 김기찬 선생이 낙죽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돼 있다.

< 김기찬 선생 >
낙죽장 기능보유자 김기찬 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중농 수준의 집안에서 자라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농사부터 집안의 잔일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며 자랐다. 이후 남도 여행을 하다 송광사에 정착해 붓글씨를 배웠고, 광주로 넘어가 사군자와 산수 그림을 배웠다. 이때 화실에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용기 선생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의 권유로 담양으로 건너가 당시 낙죽장 기능보유자였던 이동련 선생에게 낙죽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동련 선생이 작고하시고 국양문 선생의 전수교육 조교가 돼 낙죽장의 대를 이었으며 지난 2000년 낙죽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돼 현재까지 전승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장
대나무에 그려 넣은 예술 낙죽
낙죽(烙竹)이란 인두로 대나무 겉면을 지져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과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나 이를 통해 만들어진 대나무 공예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고, 낙죽장(烙竹匠) 은 이러한 기능 또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대나무와 죽세공품으로 유명한 전남 담양 지역에서 성행했다.
낙죽의 시초나 발달과정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유물이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에도 일반 생활필수품의 수요에 따라 낙인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경국대전》에서 명시한 경공장(京工匠)이나 외공장(外工匠)에도 낙죽장은 포함돼 있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다만 19세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순조 말에 박창규라는 사람이 낙화를 잘한다”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어 박창규에 의해 일제강점기까지 이 기술이 전승됐을 것으로 보인다.
낙죽은 온도를 맞춰 그려야 하고 인두가 식기 전에 한 무늬나 글씨를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에 작업 경험과 빠른 속도의 인두질, 정확한 묘사력을 필요로 한다. 주로 화살대나 침통, 칼자루, 병풍, 담뱃대, 부채, 대나무 필통, 참빗, 죽장(竹杖) 등에 작업을 하고, 특히 합죽선(合竹扇)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 쓰이는 두꺼운 대나무 살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낙죽을 할 때 새기는 무늬로는 소라문, 산수문, 뇌문, 운문, 귀갑문, 매화나 국화 등 사군자문, 십장생문, 박쥐문, 연화문, 운문(雲文) 등이 있으며 세필의 숱한 글자를 써넣기도 한다.
낙죽하는 작업을 ‘낙(烙) 놓는다’ ‘낙질한다’ ‘낙지한다’라고 하는데 이때 쓰이는 도구는 인두와 화로 뿐이다. 인두는 바느질 인두와는 형태가 다르게 호미처럼 ‘ㄱ’자 모양으로 안으로 굽은 형태로 되어있다. 몸체는 앵무새부리처럼 두툼하게 둥글지만 끝은 뾰족하다.
낙죽을 하기 위해서는 열기를 유지하기 위해 인두 두 개를 준비해 화로에 꽂아두고 번갈아 사용한다. 먼저 인두의 끝을 숯불에 가열시키고 멍석에 달궈진 숯을 문지르고 불 근처에 갖다 대 열도를 가늠한 후 낙죽을 하기 시작한다. 검정색은 인두 끝의 열이 높을 때 표현되고, 다갈색은 인두 끝의 열이 낮을 때 표현된다. 이 때 알맞게 뜨겁도록 하고, 알맞게 뜨거워진 인두를 사용해 작업을 해야하는데 숙련된 기술과 오랜 경험을 요한다.
낙죽장은 1961년 11월 29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됐다. 초대 기능보유자는 담양에서 근세 낙죽의 명인이라 불리던 김원형 선생에게 낙죽을 배운 이동련 선생이 인정됐으며 김원형 선생의 아들 김양언 선생과 국양문 선생이 뒤를 이었고재는 김기찬 선생이 낙죽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돼 있다.
< 김기찬 선생 >
낙죽장 기능보유자 김기찬 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중농 수준의 집안에서 자라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농사부터 집안의 잔일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며 자랐다. 이후 남도 여행을 하다 송광사에 정착해 붓글씨를 배웠고, 광주로 넘어가 사군자와 산수 그림을 배웠다. 이때 화실에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용기 선생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의 권유로 담양으로 건너가 당시 낙죽장 기능보유자였던 이동련 선생에게 낙죽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동련 선생이 작고하시고 국양문 선생의 전수교육 조교가 돼 낙죽장의 대를 이었으며 지난 2000년 낙죽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돼 현재까지 전승활동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