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의 기와지붕 추녀마루 위에 줄줄이 놓여있는 와제토우(瓦製土偶)를 우리는 ‘잡상(雜像)’이라고 부른다. 손으로 투박하게 만든 사람 형상의 잡상을 선두로 각기 다른 모습을 띤 동물 형상의 잡상을 3, 5, 7 등 홀수로 장식했다. 화재와 액을 막아준다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잡상은 주로 궁궐의 정전, 왕의 침전, 궁궐의 정문, 도성의 성문, 궁궐안의 누정, 왕릉·왕비릉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동묘 등에 한정되었으며 민가, 서원, 지방향교 등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않았다.
조선 광해군 때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1~1623)이 지은 설화집 《어우야담》에 의하면 신임관(新任官)이 선임관들에게 첫인사할 때 반드시 대궐문루 위의 이 10신상 이름을 단숨에 10번 외워보여야 받아들여진다고 하면서 ①대당사부(大唐師傅, 삼장법사) ②손행자(孫行者, 손오공) ③저팔계(猪八戒) ④사화상(沙和尙, 사오정) ⑤마화상(麻和尙, 말의 형상) ⑥삼살보상(三煞菩薩, 모든 재앙을 막아주는 잡상) ⑦이구룡(二口龍, 입과 귀가 두 개인 형상) ⑧천산갑(穿山甲, 머리에 뿔과 등에 혹을 가진 형상) ⑨이귀박(二鬼朴, 허리 앞뒤에 뿔이 난 형상) ⑩나토두(羅土頭, 용의 형상)의 상을 적고 있다. 이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 및 토신의 이름들이다.
중국에 보이는 잡상은 요대(遼代) 9세기 말부터로 여겨지고 있으며 명·청 시대에 유행했다. 우리나라는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고려 말의 《관경변상도》의 서품 등에 세부는 불분명하나 웅크리고 앉은 2, 3개의 잡상이 궁전지붕에 그려진 자료를 찾아볼 수 있으며, 본격적으로 성행한 시기는 조선 시대라 할 수 있다.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의 기와지붕 추녀마루 위에 줄줄이 놓여있는 와제토우(瓦製土偶)를 우리는 ‘잡상(雜像)’이라고 부른다. 손으로 투박하게 만든 사람 형상의 잡상을 선두로 각기 다른 모습을 띤 동물 형상의 잡상을 3, 5, 7 등 홀수로 장식했다. 화재와 액을 막아준다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잡상은 주로 궁궐의 정전, 왕의 침전, 궁궐의 정문, 도성의 성문, 궁궐안의 누정, 왕릉·왕비릉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동묘 등에 한정되었으며 민가, 서원, 지방향교 등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않았다.
조선 광해군 때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1~1623)이 지은 설화집 《어우야담》에 의하면 신임관(新任官)이 선임관들에게 첫인사할 때 반드시 대궐문루 위의 이 10신상 이름을 단숨에 10번 외워보여야 받아들여진다고 하면서 ①대당사부(大唐師傅, 삼장법사) ②손행자(孫行者, 손오공) ③저팔계(猪八戒) ④사화상(沙和尙, 사오정) ⑤마화상(麻和尙, 말의 형상) ⑥삼살보상(三煞菩薩, 모든 재앙을 막아주는 잡상) ⑦이구룡(二口龍, 입과 귀가 두 개인 형상) ⑧천산갑(穿山甲, 머리에 뿔과 등에 혹을 가진 형상) ⑨이귀박(二鬼朴, 허리 앞뒤에 뿔이 난 형상) ⑩나토두(羅土頭, 용의 형상)의 상을 적고 있다. 이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 및 토신의 이름들이다.
중국에 보이는 잡상은 요대(遼代) 9세기 말부터로 여겨지고 있으며 명·청 시대에 유행했다. 우리나라는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고려 말의 《관경변상도》의 서품 등에 세부는 불분명하나 웅크리고 앉은 2, 3개의 잡상이 궁전지붕에 그려진 자료를 찾아볼 수 있으며, 본격적으로 성행한 시기는 조선 시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