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후미진 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고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萬年松)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 초야에 묻혀 살아가는 선비 정신의 청정함을 노래한 송은 김광수의 ‘萬年松’ -

<만취당전경>
< 현재 의성 만취당 보수 전경 >

<만취당>
< 보수 전 의성 만취당 전경 >
의성 사촌(沙村)마을은 고려 후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의 6세손인 김자첨(金子瞻) 공이 1392년 안동 회곡(檜谷)에서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 따 ‘사촌(沙村)’이라 하였다. 그 후 1750년 무렵 병촌 류태춘(屛村 柳泰春)이 이곳에 이주하여 수백 년 동안 안동김씨(安東金氏)와 풍산유씨(豊山柳氏) 등이 세거한 마을이다. 만취당 김사원(晩翠堂 金士元, 1539~1601)과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등 40여명의 과거 급제자와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여 지난 600년 간 의성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반촌마을로 명성이 높다. 이 마을은 ‘와해(瓦海)’라고 불릴 정도로 기와집이 많았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사촌마을은 풍수상으로도 명당이다. 마을 뒷산인 자하산은 문필봉의 형국이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우측은 광활하다. 우백호가 없는 우측을 보하기 위해 마을 서편 매봉산 기슭을 따라 길이 약 1,040m, 폭 40m의 방풍림을 비보로 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성 사촌리 가로숲(義城 沙村里 가로숲, 천연기념물 제405호)이다. 김자첨이 마을에 입향하면서 조성한 이 숲은 수령 300~600년 정도 된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 수종이 서로 어우러져 울창하고 장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600년을 넘게 사촌마을의 희노애락을 함께 한 숲이자 마을의 쉼터이다.
만취당 선생은 연산군 때 이름난 선비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1563)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김세우(金世佑)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김만겸(金萬謙)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부모를 정성으로 섬겼으며, 이웃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청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20살이 넘어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문하로 들어간 선생은 과거공부의 뜻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력하면서 의문이 생기면 묻고 얻음이 있으면 이를 명심하여 잊지 않았다. 임진왜란 시에는 향인(鄕人)들에 의해 의성 정제장(整齊將)으로 추대되어 의병대장 김해(金垓)를 도우면서 활약하였다. 전란 후에는 기근이 겹치자 집안의 재물을 내어 음식과 곡식을 제공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無償)으로 구제하였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부르며 선생을 칭송했다. 어떤 사람이 전답이나 노비문서를 가지고 와서 사례를 하려고 하면 선생은 웃으면서 “그대들이 스스로 먹고 살지 못하니 내 마음이 애처로워서 도와준 것뿐인데 어찌 그 보답을 바라겠는가”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고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존경하였다고 한다.
의성 만취당(義城 晩翠堂, 경북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 경북유형문화재 제169호)은 부호군을 지낸 만취당 선생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했다. 선생은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완성하였으며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당호를 붙였다. 그 후 숙종 32년(1711)에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고, 영조 3년(1727)에는 동쪽 방(복제-復齊)을 동왕 40년(1764)에는 서쪽 방을 증축함으로써 지금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만취당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뼈대만 드러낸 채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 중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국보 제15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국보 제18호)과 함께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만취당은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된 것과 이후의 중수, 증축된 연대가 확실하며, 이러한 변화과정이 건축기법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도리(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와 대량(大樑, 대들보)의 구조결구법(構造結構法), 종대공(宗臺工, 종도리를 받치는 부재)과 종량받침의 치목수법, 평고대(平交臺, 처마 곡선의 긴 부재)와 연함(連含, 기와 받침 부재)의 단일부재 수법 등 초창 당시의 건축수법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만취당은 사랑채 격이지만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서 정자 같은 느낌을 준다. 만취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에 복재 1칸과 서소익실 2칸이 누각 뒤쪽에 동·서로 각각 붙는 ‘T’자형 건물로 내부는 우물마루와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이 짜여진 5량가구(五樑架構)에 팔작지붕이며, 양쪽 익사(翼舍)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현판은 만취당 선생과 동문인 명필가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가 썼다. 신기하게도 천장 한쪽에 사찰의 내부에 있는 닫집처럼 단청을 해 놓은 곳이 있다. 의문을 가져보지만 아쉽게도 명확한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안대청>
종택의 본채 건물은 선생이 만취당을 짓기 전 선조 9년(1576)에 60여칸을 창건하였으나 후손들이 중수하면서 그 규모가 반으로 줄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의성에서도 병신의병(1896)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마을을 불태웠는데 이때 소실되어 5칸 반 겹집으로 중건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가 어렵게 되자 철거하고 정침 5칸 겹집과 서편에 곡자 2칸으로 고쳐 짓고, 사랑채 3칸 반겹의 곡자와 대문채 3칸을 신축하였다. 그 후 문중에서는 종택의 옛 모습을 갖추고자 1980년대에 만취당과 종택 앞에 있던 개인 주택을 매입해 철거하고 주변 정비 작업을 진행했으며 만취당 남쪽 우물을 정비하고 담장 앞에는 잔디밭을 조성하였다.

<만취당보수>
‘만취당(晩翠堂)’,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푸르른 소나무의 기상을 품고 있는 집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 했다.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날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
이끼 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후미진 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고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萬年松)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 초야에 묻혀 살아가는 선비 정신의 청정함을 노래한 송은 김광수의 ‘萬年松’ -
<만취당전경>
< 현재 의성 만취당 보수 전경 >
<만취당>
< 보수 전 의성 만취당 전경 >
의성 사촌(沙村)마을은 고려 후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의 6세손인 김자첨(金子瞻) 공이 1392년 안동 회곡(檜谷)에서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 따 ‘사촌(沙村)’이라 하였다. 그 후 1750년 무렵 병촌 류태춘(屛村 柳泰春)이 이곳에 이주하여 수백 년 동안 안동김씨(安東金氏)와 풍산유씨(豊山柳氏) 등이 세거한 마을이다. 만취당 김사원(晩翠堂 金士元, 1539~1601)과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등 40여명의 과거 급제자와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여 지난 600년 간 의성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반촌마을로 명성이 높다. 이 마을은 ‘와해(瓦海)’라고 불릴 정도로 기와집이 많았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사촌마을은 풍수상으로도 명당이다. 마을 뒷산인 자하산은 문필봉의 형국이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우측은 광활하다. 우백호가 없는 우측을 보하기 위해 마을 서편 매봉산 기슭을 따라 길이 약 1,040m, 폭 40m의 방풍림을 비보로 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성 사촌리 가로숲(義城 沙村里 가로숲, 천연기념물 제405호)이다. 김자첨이 마을에 입향하면서 조성한 이 숲은 수령 300~600년 정도 된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 수종이 서로 어우러져 울창하고 장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600년을 넘게 사촌마을의 희노애락을 함께 한 숲이자 마을의 쉼터이다.
만취당 선생은 연산군 때 이름난 선비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1563)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김세우(金世佑)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김만겸(金萬謙)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부모를 정성으로 섬겼으며, 이웃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청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20살이 넘어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문하로 들어간 선생은 과거공부의 뜻을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력하면서 의문이 생기면 묻고 얻음이 있으면 이를 명심하여 잊지 않았다. 임진왜란 시에는 향인(鄕人)들에 의해 의성 정제장(整齊將)으로 추대되어 의병대장 김해(金垓)를 도우면서 활약하였다. 전란 후에는 기근이 겹치자 집안의 재물을 내어 음식과 곡식을 제공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무상(無償)으로 구제하였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부르며 선생을 칭송했다. 어떤 사람이 전답이나 노비문서를 가지고 와서 사례를 하려고 하면 선생은 웃으면서 “그대들이 스스로 먹고 살지 못하니 내 마음이 애처로워서 도와준 것뿐인데 어찌 그 보답을 바라겠는가”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고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존경하였다고 한다.
의성 만취당(義城 晩翠堂, 경북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 경북유형문화재 제169호)은 부호군을 지낸 만취당 선생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했다. 선생은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완성하였으며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당호를 붙였다. 그 후 숙종 32년(1711)에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고, 영조 3년(1727)에는 동쪽 방(복제-復齊)을 동왕 40년(1764)에는 서쪽 방을 증축함으로써 지금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만취당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뼈대만 드러낸 채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 중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국보 제15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국보 제18호)과 함께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만취당은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된 것과 이후의 중수, 증축된 연대가 확실하며, 이러한 변화과정이 건축기법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도리(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와 대량(大樑, 대들보)의 구조결구법(構造結構法), 종대공(宗臺工, 종도리를 받치는 부재)과 종량받침의 치목수법, 평고대(平交臺, 처마 곡선의 긴 부재)와 연함(連含, 기와 받침 부재)의 단일부재 수법 등 초창 당시의 건축수법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만취당은 사랑채 격이지만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서 정자 같은 느낌을 준다. 만취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에 복재 1칸과 서소익실 2칸이 누각 뒤쪽에 동·서로 각각 붙는 ‘T’자형 건물로 내부는 우물마루와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이 짜여진 5량가구(五樑架構)에 팔작지붕이며, 양쪽 익사(翼舍)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현판은 만취당 선생과 동문인 명필가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가 썼다. 신기하게도 천장 한쪽에 사찰의 내부에 있는 닫집처럼 단청을 해 놓은 곳이 있다. 의문을 가져보지만 아쉽게도 명확한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안대청>
종택의 본채 건물은 선생이 만취당을 짓기 전 선조 9년(1576)에 60여칸을 창건하였으나 후손들이 중수하면서 그 규모가 반으로 줄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의성에서도 병신의병(1896)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마을을 불태웠는데 이때 소실되어 5칸 반 겹집으로 중건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가 어렵게 되자 철거하고 정침 5칸 겹집과 서편에 곡자 2칸으로 고쳐 짓고, 사랑채 3칸 반겹의 곡자와 대문채 3칸을 신축하였다. 그 후 문중에서는 종택의 옛 모습을 갖추고자 1980년대에 만취당과 종택 앞에 있던 개인 주택을 매입해 철거하고 주변 정비 작업을 진행했으며 만취당 남쪽 우물을 정비하고 담장 앞에는 잔디밭을 조성하였다.
<만취당보수>
‘만취당(晩翠堂)’,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푸르른 소나무의 기상을 품고 있는 집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 했다.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날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