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승]명승 제33호 《춘향전》의 무대가 된 천상의 정원, 광한루원(廣寒樓苑)



남원하면 《춘향전》과 광한루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이 바로 광한루원(廣寒樓苑, 명승 제33호))이다. 이곳은 한국 전통정원 가운데서도 손꼽히는데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표현한 광한루(廣寒樓)와 지상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을 표현한 3개의 섬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누원(樓苑)의 모습을 보여주고 천상관과 신선사상을 정원에 표현하는 조선 시대 정원유적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광한루와 오작교>


 현재의 광한루원은 광한루 누각과 정원을 중심으로 한 역사공원 형태를 띄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각 공간마다 건물이 들어서 지금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이곳에 처음 방문한 이들은 광한루와 한 공간에 있는 월매집 등의 건물들이 모두 다 옛것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다. 광한루원은 동서 100m, 남북 60m에 이르는 연못과 못 속의 3개의 섬,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주 공간 요소로 하고 있다. 동쪽에는 영주각이 있고, 봉래섬은 대나무 숲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오작교의 우측 섬에는 육각형의 방장정이 위치하고 있다. 세 개의 섬 사이에는 목교로 이어져 있으며, 봉래섬 북측에도 다리를 놓아 광한루와 연결되게 하였다. 


<광한루 연못>


 광한루원은 지리산에서 발원한 요천의 남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측에 위치한 광치천을 주변 수계로 삼고 있다. 연못의 물은 방장산에서 발원한 요천의 강물을 동쪽으로 끌어들여 일부는 오작교 밑을 지나 서쪽 연못으로 흘러나가고, 일부는 영주각 남측 완월정의 방지를 거쳐 요천으로 흘러나간다. 연못의 남쪽과 동쪽 호안 석축은 직선형으로 처리하였으나, 광한루 전면의 북쪽 호안은 세 곳에 돌출부를 두었다. 또한 광한루원 내에는 춘향의 얼을 추모하는 춘향사당이 있고, 남쪽으로는 완월정, 월매집 등이 위치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광한루원 전경>


 광한루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황수신의 《광한루기(廣寒樓記)》(1458)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19년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된 시기에 축조한 광통루라는 누각은 광한루의 전신에 해당하며, 일대의 지형이 완만하고 요천을 근간으로 하는 작은 단일 누각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희의 귀경 후 광통루는 헐리고, 1434년 당시 남원부사 민여공이 새로운 누각을 조성하였으며, 1444년(세종 26) 도순찰사 정인지(鄭麟趾, 1396- 1478)가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본 따 ‘광한루(廣寒樓)’라 명명한데에서 유래되었다(박영순, 2009). 


<오작교>


 광한루가 조성된 이후 전라감사 정철(鄭澈, 1536~1593)과 남원부사 장의국이 부임기간 내 광한루를 중수하고 요천강을 끌어다가 호수를 마련하고, 오작교를 조성함으로써 광한루 일대를 정원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조성 당시 광한루는 누명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 주변이 선계(仙界)에 비유되는 장소성을 지니고 있어, 요천을 끌어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와 오작교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강기옥, 2014). 

 그러나 광한루원은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으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광한루중수서(廣漢樓重修序)에는 ‘정유년에 이르러 왜구(倭寇)들에 의해 훼철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유재란 이후 남원의 복구와 재건의 진행과 함께 본격적인 광한루의 중건은 1625년 부사 신감(申鑑)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용성지(龍城誌)》에 1795년(정조 19) 남원부사 이만길(李萬吉)이 영주각을 중수하고, 편액을 써서 걸었다는 기록을 통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광한루원 일대의 모습이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광한루원의 경계 밖 남측에는 율림(栗林)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남원부사인 유지례가 부임 당시 광한루의 남측에 밤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고지도에서도 광한루 일대를 ‘장시(場市)’로 명시하고 있어 성외 장시로서 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한루원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광한루원 내에 식재된 수종중 상위 5개 수종은 소나무(130주), 느티나무(121주), 은행나무(58주), 배롱나무(47주), 산수유(44주) 순이었고 대부분의 수종은 1~40주 미만이다. 현재 광한루원 내에서 개체수가 많은 수종들은 대체로 잔디광장에 심어져 있는 수목으로 1980년대 이후 잔디광장이 조성되는 정비사업 당시 식재된 것으로 보여 진다. 

 

 광한루원에서 《춘향전》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춘향전》의 발생 경로와 관련하여 기존 연구에서는 무속 기원설과 판소리를 통한 기원이 설득력이 높다 할 수 있으나,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각종 고사 및 설화 등 ‘허구’를 가미한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종 민중의 참여 및 첨삭을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춘향전》의 배경으로서의 광한루를 소설에서 나타나는 단순 허구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적 관점에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광한루는 상징적 요소로서 문화경관을 구성하는 대표적 장소라 할 수 있다. 


광한루 연못(흑백)

 광한루원과 관련하여 이러한 문화경관의 특성이 나타나는 중요한 사료로는 양반층에서 유행하던 수산 조항의 《광한루기(廣寒樓記》라는 소설이 있다. 이는 《춘향전》을 모태로 한 것이지만 대중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 소설은 선비들이 선호하였던 정원요소를 주로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매개체로 광한루원을 삼고 있다. 연못 등의 경관요소를 먼저 묘사하면서 주변의 배경을 설명하고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가 하면 인물의 주변에 있는 정원 속에 화목류는 그 주인공의 성격과 심정을 상징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수목으로는 소나무, 계수나무, 수양버들, 버드나무, 반죽, 벽오동, 석류, 오동나무, 작약, 모란, 복숭아, 대나무, 국화, 매화, 해당화, 연꽃, 살구 등이 등장하는데 상징적 의미와 함께 그 자태가 면밀히 묘사되며 이는 선비들의 품격에 어울리는 식물재료가 위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예로 춘향의 거처에 정원은 연못과 가산과 괴석, 반죽과 벽오동이 식재되어 있는 등 기생의 집이나 사대부의 품격에 어울리는 경관의 구성을 보여줌으로써 기존 《춘향전》에 묘사되는 기생과 남녀상열지사의 세속적인 면에 반전을 주었다. 이러한 점은 한국정원의 경관연출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광한루 정면 설경>


 광한루원은 광통루라는 역사적 건축물과 삼신산이 조성된 정원, 이에 《춘향전》이라는 소설이 더해져 가치 있는 다양한 요소를 문화로 엮어낸 최고의 명승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기옥(2014),오늘의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2014), 원림복원을 위한 전통공간 조성기법 연구

박영순(2009),남원의 광한청허부,국토연구,334.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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