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승]명승 제36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서울 付岩洞 白石洞天) 도심 내 숨겨진 폐허의 미학,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동천(洞天)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여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명승 ‘백석동천’은 주변에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백석은 북악산을 뜻하기도 한다.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서울 付岩洞 白石洞天, 명승 제 36호)은 위요된 공간 속에 펼쳐진 폐쇄된 지형 속에 지금은 사라진 건물의 흔적들이 물과 돌과 나무와 어우러져 또 다른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 한국정원은 도성 가까운 곳에서 심산계곡이 펼쳐있는 비밀스러운 곳을 찾는 양상을 띠게 된다. 조선후기 권력층인 경화세족들을 중심으로 도성 안 가까운 곳에 정원을 조성하는 경향을 보여 왔는데 부암동의 석파정과 부암정, 성북동의 성락원이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다.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유적 연못>


 ‘폐허의 미학’이라는 말처럼 과거 부흥했던 때를 알려주는 건물의 초석들이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고 물이 마른 연못터 마저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고즈넉한 곳이다. 중국의 역사학자 여추우(余秋雨)는 과거의 유적이 만들어내는 장소를 두고 ‘흔적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풍경으로 폐허 자체를 예찬하기도 했다. 또 이곳은 밖에서도 한 번에 조망되지 않으며 안에서도 열려있는 곳이 적은 숨어살기 적당한 터이기도 하다.


<백석동천 각자바위>


 백석동천으로의 여정은 세검정 인근 경사진 곳에 입지한 마을길을 따라 홍제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불암바위를 지나 백사실폭포를 먼저 만나게 된다. 폭포라 부르기에 규모가 작은 이 계곡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암반에 제법 맑고 거센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낙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여름철 피서지로도 인기가 높다. 폭포에 인접한 현통사 사찰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백석동천은 인근 주민들에게 백사실로 더 유명하다. 다시 계류를 따라 계곡 속으로 들어가면 경관요소들이 좌우에 분산되어 이어져 있다. 중심공간인 백석동천 별서유적은 좌측에 연못과 정자터, 그리고 한단 높게 부지를 조성한 건물터를 위주로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가운데 계류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경사지에 ‘월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별서유적을 지나 계류 상류인 약수터 초입부에서 능금마을로 진입하는 동선과 백석동천 각자바위로 가는 동선으로 나누어진다. 계류로 이어지는 능금마을의 동선은 백석동천 길로 연결되고, 백석동천 각자바위 동선의 끝자락은 응선사와 연결되어 있다.

 서울 도심 가까운 곳에서 쉽게 자연계곡으로 이어지는 곳이 드문데 백석동천이 그 중 하나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국회의 탄핵의결로 직무가 정지됐을 당시 청와대 넘어 이곳을 산책하다 뜻밖의 경치에 감탄한 것으로 점차 유명해져 오늘날 명승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백석동천 별서유적 연못(이른 봄 전경)

 그간 백석동천의 주인에 대한 내용은 오리무중이였다. 백사실이란 이름에 근거하여 백사 이항복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었으나 이항복은 이곳에서 지낸 사실이 없어 사실과는 다르다.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연구 용역결과, 추사 김정희의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발견되었다. 백석동천은 백석정(白石亭), 백석실(白石室), 백사실(白沙室)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조선 말기 박규수의 《환재집(瓛齋集)》에 수록된 시에 ‘백석정’이란 내용이 전한다. 추사의 《완당전집 권9(阮堂全集 券九)》에 “선인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라는 내용과 주석(註釋)에서 “나의 북서(北墅)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라는 내용 이외에도 관련 시들을 분석한 결과 추사가 터만 남은 백석정 부지를 사들여 새로 건립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이견을 보이는 학자도 있으며 백석동천 내의 월암(月巖), 백석동천 각자 바위들의 서예사(書藝史)적 감식을 통해 글쓴이를 밝혀내고 관련 자료를 비교 분석해야 하는 일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백석동천 1935년7월19일자 기사>


 백석동천의 공간구성에 관한 문헌자료로는 서울시 ‘동명연혁고’에 따르면 백석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인근 마을이 백석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1830년대 지어진 600여 평의 별장으로 안채는 4량의 집이며 1917년경 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1967년경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랑채는 ‘ㄱ’자 5량의 집으로 기둥이 굵고 누마루를 놓았으나 1970년경 허물어졌다고 하며 연못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가 다시 지었는데 1970년경에 허물어졌다고 한다. 193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연못의 정자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백석동천 별서유적 건물터 및 방지>


 이를 통해 지금은 초석만 남아있는 정자의 한국전쟁 전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종로구청은 2011년부터 백석동천 종합정비계획을 추진해 왔으나 건축물에 관한 고증자료 부족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복원계획을 전면백지화 한 적도 있었다. 


<백석동천 별서유적 연못주변 경관>


 백석동천 구역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가장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산벚나무와 아까시나무, 잣나무, 밤나무 팥배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특히 접목으로 번식되는 감나무가 분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인위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라고 한다. 또한 잣나무, 전나무, 영산홍 등 최근에 인위적으로 식재한 수종도 발견된다. 유명 TV프로그램에 도룡뇽의 서식지로 소개되어 유명해진 일화도 있을 만큼 이 지역은 우수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백석동천은 자연생태계를 거스르지 않고 인간의 정도를 지키며 살다간 조상들의 자연관과 그 속에서 희구했던 이상의 세계가 돋보이는 가치 높은 정원이며 오늘날은 이러한 흔적이 폐허의 미학으로 남아 또 다른 묘미를 주는 도심 내 역사가 멈춘 비밀의 정원이라 칭송할 만하다.



 

<참고문헌>

정기호, 성균관대학교 산학렵력단(2012), 명승 경관자원 조사연구 및 DB구축 5차,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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