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나루는 공주지역 금강 및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지대와 금강변 나루 일대로, 공주시 웅진동에서 맞은편 우성면 도천리(道川里)를 연결하던 나루였다. 바로 아랫부분에는 금강의 용왕신(龍王神)에게 제를 지내던 곰사당(웅진단, 熊津壇)이 있다. 이 나루의 상류 쪽으로는 산성동에 산성나루가 있었고, 하류 쪽으로는 같은 웅진동에 되데울나루가 있었다.
이곳은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역사문화명승지이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인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 썼다. 고마나루를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지금의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록으로 보면 고마나루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에 웅진(熊津)으로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정재윤, 2011) 이는 한자화된 표기로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기록으로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관련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웅진도(熊津渡)’로, 《한국지명요람》에서는 고마나루, 곰나루 및 웅진으로 각각 소개되어 있다. 또 곰아나루, 웅아진(熊兒津)으로도 불렸다.
《해동역사》에 보면 고마성(固麻城)고마성(固麻城)고마(固麻)는 ‘고마’의 차음(借音)으로, 웅진(熊津) 즉 ‘고마나루’를 가리키는 바, 지금의 공주(公州)를 일컫는 것으로 기록하였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경도한성부에도 고마나루가 등장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 임신에 남한산(南漢山) 지금의 광주(廣州)로부터 와서 도읍을 정하여 105년을 지내고,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의 난을 피하여 고마나루(熊津) 즉 웅진 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고마나루와 관련된 제사의식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고마나루, 웅진지역은 中祀라고 하는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지로 관할하고 있다. 웅천주에서 관할하던 제사의 장소에 대하여 곰나루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 후 고려 시대에는 특별한 전승기록이 없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많은 제사 관련 사료들이 보이고 있다. 조선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사료들은 고마나루 전설이 가지고 있는 곰신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大川에 대한 제사로 정착되어 진행된다. 또한 이곳은 일반 서민들의 주요 생활터이자 수상교통로로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지금은 고마나루터라는 표지석만 남아있고 구체적인 위치는 알려진 바 없지만 오랜 세월동안 강나루를 오가며 깃들었던 수많은 사연들은 물길 속에 묻힌 듯하다. 지금은 인근에 공주보가 있어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하염없이 흘러가는 고마나루의 물살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떠오르게 한다.
“옛날에 나무꾼 총각이 숲이 울창한 지금의 연미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캐다가 큰 암곰을 만나서 몸이 사로잡혀 곰과 같이 굴속에서 동거하게 되었고, 암곰은 새끼를 낳았다. 이후 암곰이 방심한 틈을 타 남자는 강물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이를 발견한 암곰이 새끼를 먼저 물에 던지고, 제 몸도 물에 빠져 죽었다.” 곰이 빠져 죽은 강이라 하여 곰강(熊江)이 되고, 곰강의 나루터는 곰나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설화는 여럿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결같이 곰을 배신한 인간의 이야기 일색이다. 곰은 그만큼 우리 민족의 신화에서처럼 신의 있고 우직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류 백제가 18년에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곰 신앙족인 부여족의 건국신화로 곰 설화를 남겼다는 설도 있다.
현재 고마나루 북쪽에 솟은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주의 마을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 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서 공주시민들의 휴식처로도 각광받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이원호 학예연구사
고마나루는 공주지역 금강 및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지대와 금강변 나루 일대로, 공주시 웅진동에서 맞은편 우성면 도천리(道川里)를 연결하던 나루였다. 바로 아랫부분에는 금강의 용왕신(龍王神)에게 제를 지내던 곰사당(웅진단, 熊津壇)이 있다. 이 나루의 상류 쪽으로는 산성동에 산성나루가 있었고, 하류 쪽으로는 같은 웅진동에 되데울나루가 있었다.
이곳은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역사문화명승지이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인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 썼다. 고마나루를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지금의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록으로 보면 고마나루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에 웅진(熊津)으로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정재윤, 2011) 이는 한자화된 표기로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기록으로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관련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웅진도(熊津渡)’로, 《한국지명요람》에서는 고마나루, 곰나루 및 웅진으로 각각 소개되어 있다. 또 곰아나루, 웅아진(熊兒津)으로도 불렸다.
《해동역사》에 보면 고마성(固麻城)고마성(固麻城)고마(固麻)는 ‘고마’의 차음(借音)으로, 웅진(熊津) 즉 ‘고마나루’를 가리키는 바, 지금의 공주(公州)를 일컫는 것으로 기록하였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 경도한성부에도 고마나루가 등장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 임신에 남한산(南漢山) 지금의 광주(廣州)로부터 와서 도읍을 정하여 105년을 지내고,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의 난을 피하여 고마나루(熊津) 즉 웅진 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인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고마나루와 관련된 제사의식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고마나루, 웅진지역은 中祀라고 하는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지로 관할하고 있다. 웅천주에서 관할하던 제사의 장소에 대하여 곰나루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 후 고려 시대에는 특별한 전승기록이 없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많은 제사 관련 사료들이 보이고 있다. 조선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의 사료들은 고마나루 전설이 가지고 있는 곰신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大川에 대한 제사로 정착되어 진행된다. 또한 이곳은 일반 서민들의 주요 생활터이자 수상교통로로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지금은 고마나루터라는 표지석만 남아있고 구체적인 위치는 알려진 바 없지만 오랜 세월동안 강나루를 오가며 깃들었던 수많은 사연들은 물길 속에 묻힌 듯하다. 지금은 인근에 공주보가 있어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하염없이 흘러가는 고마나루의 물살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 처녀곰과 나무꾼 총각에 얽힌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이 떠오르게 한다.
“옛날에 나무꾼 총각이 숲이 울창한 지금의 연미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캐다가 큰 암곰을 만나서 몸이 사로잡혀 곰과 같이 굴속에서 동거하게 되었고, 암곰은 새끼를 낳았다. 이후 암곰이 방심한 틈을 타 남자는 강물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이를 발견한 암곰이 새끼를 먼저 물에 던지고, 제 몸도 물에 빠져 죽었다.” 곰이 빠져 죽은 강이라 하여 곰강(熊江)이 되고, 곰강의 나루터는 곰나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설화는 여럿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결같이 곰을 배신한 인간의 이야기 일색이다. 곰은 그만큼 우리 민족의 신화에서처럼 신의 있고 우직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류 백제가 18년에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곰 신앙족인 부여족의 건국신화로 곰 설화를 남겼다는 설도 있다.
현재 고마나루 북쪽에 솟은 연미산 중턱에는 전설 속 곰이 살았다는 곰굴이 고마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곰의 원한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루터 인근에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금강변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450여주의 마을 솔밭이 금강 및 연미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 문화적·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로서 공주시민들의 휴식처로도 각광받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이원호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