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명승 중에 정원유적은 자연과 인간의 적절한 연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서양과 같이 자연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태고부터의 자연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없다.
한국의 정원은 자연에 순응하고 유유자적하는 인간의 삶 그 자체요, 자연 속에 적절한 인공을 표 나지 않게 잘 섞어놓은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정신문화적 소산이다. 산과 물이 적절히 만나는 아늑한 공간에 터를 잡고 쉴만한 건물을 지어 주변 경관을 노래하고 심신을 수양했던 곳이 한국 정원이 가진 하나의 모습인 별서정원이다. 옛 문헌을 보면 정원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용어인 ‘원림’은 ‘동산의 뜰’로 사용 되었는데(박경자,2014), 인공적으로 구획된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원을 이루는 주재료는 외부공간에 자연경물을 위주로 조성되고 구획을 특별히 정하지 않은 탓에 주인이 떠나게 되면 쉽게 퇴락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히 옛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뜻있는 후손들이 다시 꾸미기를 반복하며 오늘날 그 모습을 다시 마주할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순천 초연정(順天 超然亭)은 1836년 청류헌 조진충에 의해 건립되어 수차례 중수를 했고,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수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는 1990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되었다가 정원유적이 명승으로 대두되던 2007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5호가 되었다.
2012년도 방문 시에는 지정 당시의 분위기가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기 어렵다. 원래 대부분의 정자가 조망이 용이한 곳에 잘 드러나도록 입지하는데 반해 초연정은 마을 뒷산의 깊은 계곡에 숨겨지듯 지어져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었다. 정자 주변에 얕은 계곡과 수목이 둘러져 생기는 명암은 마치 비밀의 정원과도 흡사했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와 관련해서 창건사적기에 보면 초연정이 있는 왕대동의 지형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곳의 모양이야 말로 마치 왕이 구중궁궐에 거처하고 있으면 장수들이 군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모습과 같다”고 표현되어 이해를 돕는다. 세상일에 아랑곳하지 않는 ‘초연(超然)’이라는 명칭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순천 초연정 상량문>
초연정의 배후에 있는 모후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며 고려 공민왕이 난을 여기서 피하면서 덕이 마치 어머니와 같다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초연정이 자리한 마을의 이름은 ‘왕대(王垈)’인데 정자 아래 암벽에 ‘왕대사적(王垈事蹟)’이라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는 옛날 군왕이 난을 피하여 이 마을에 잠깐 머물렀다고 해서 불렸다 하며 기문은 1834년 조진충의 형제였던 조진구가 지었다고 한다. 초연정의 조성자 조진충은 학문에 심취하였으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 못마땅하여 은둔할 곳을 찾던 차에 현재 초연정 인근에 있는 조상의 묘소에 제사 올릴 때마다 자손들이 머물 곳이 마땅히 없자 일가의 도움을 얻어 정자를 건립하게 된 것이라 한다. 초연정은 옥천조씨의 제각으로 선조의 묘아래 위치하여 가족들이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면서도 자손들과 지인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기도 하는 다목적 공간이었으며 노년에 대비하여 마련한 은거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후에 옥천조씨 문중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강학하고 초연정의 이름을 지어준 송병선을 추모하는 곳이기도 했다.
원래 이곳은 대광사의 승려가 수석정을 짓고 수도했던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초연정의 자료를 집대성한 순천의 사학자 최인선 교수의 연구 덕분에 이곳의 조성목적과 경관구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1890년 송병선이 지은 초연정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뒷산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공간이 하나 있으니 (중략) 산이 겹겹이 둘러있고 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으며 인적이 드물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전에 진충이 처음 이곳에 찾아와 정자 하나를 엮었다. 암석이며 샘물, 폭포 등은 자연 그대로이며 소나무 오동나무 대나무 꽃등은 인공적으로 꾸민 것들이다. 옹은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략) 이곳에 찾아와 노닐곤 하며 아득히 세속에서 초탈한 사상을 지닌 듯하였다. 이곳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갔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찾아와 놀다가곤 하였다. 그의 큰 아들 재호가 중수를 하고 기와를 덮어 이전보다 더 낫게 꾸몄다 한다”.
현재 초연정 건물은 정면 3칸에 전후퇴로 단층 홑처마 팔작지붕에 기와로 되어 있다. 좌측 1칸이 마루이며 나머지 1칸 반 정도를 방으로 하였고 그 우측에 부엌으로 되어 있다. 지정보고서에 보면 초연정 전면의 계곡의 유량은 적은 편이며 물이 맑아 아름다운 바위와 암벽에 의지해 자라는 개서어나무 등이 활엽수 2차림이 잘 발달했다고 적고 있다. 옛 기록에는 이곳에 수석이 좋고, 숲이 깊고, 뽕나무 삼베나무가 풍부하다고도 했다. 원림의 구성요소에 관한 최 교수가 제시한 단서로는 1897년 초연정중수실기에 보면 정자, 담장, 연못, 누대, 큰 문 작은 문 등을 모두 손보았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 비교자료 추적을 통해 과거의 원형을 되찾길 기대해 본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최인선(2012), 순천 초연정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7).
국립문화재연구소(2014)명승지정 기준 내 경승지 개념 확립을 위한 기초연구
문화재청 홈페이지
우리나라 명승 중에 정원유적은 자연과 인간의 적절한 연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서양과 같이 자연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태고부터의 자연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없다.
한국의 정원은 자연에 순응하고 유유자적하는 인간의 삶 그 자체요, 자연 속에 적절한 인공을 표 나지 않게 잘 섞어놓은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정신문화적 소산이다. 산과 물이 적절히 만나는 아늑한 공간에 터를 잡고 쉴만한 건물을 지어 주변 경관을 노래하고 심신을 수양했던 곳이 한국 정원이 가진 하나의 모습인 별서정원이다. 옛 문헌을 보면 정원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용어인 ‘원림’은 ‘동산의 뜰’로 사용 되었는데(박경자,2014), 인공적으로 구획된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된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원을 이루는 주재료는 외부공간에 자연경물을 위주로 조성되고 구획을 특별히 정하지 않은 탓에 주인이 떠나게 되면 쉽게 퇴락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히 옛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뜻있는 후손들이 다시 꾸미기를 반복하며 오늘날 그 모습을 다시 마주할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순천 초연정(順天 超然亭)은 1836년 청류헌 조진충에 의해 건립되어 수차례 중수를 했고,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수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는 1990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되었다가 정원유적이 명승으로 대두되던 2007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5호가 되었다.
2012년도 방문 시에는 지정 당시의 분위기가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기 어렵다. 원래 대부분의 정자가 조망이 용이한 곳에 잘 드러나도록 입지하는데 반해 초연정은 마을 뒷산의 깊은 계곡에 숨겨지듯 지어져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었다. 정자 주변에 얕은 계곡과 수목이 둘러져 생기는 명암은 마치 비밀의 정원과도 흡사했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와 관련해서 창건사적기에 보면 초연정이 있는 왕대동의 지형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곳의 모양이야 말로 마치 왕이 구중궁궐에 거처하고 있으면 장수들이 군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모습과 같다”고 표현되어 이해를 돕는다. 세상일에 아랑곳하지 않는 ‘초연(超然)’이라는 명칭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순천 초연정 상량문>
초연정의 배후에 있는 모후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며 고려 공민왕이 난을 여기서 피하면서 덕이 마치 어머니와 같다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초연정이 자리한 마을의 이름은 ‘왕대(王垈)’인데 정자 아래 암벽에 ‘왕대사적(王垈事蹟)’이라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는 옛날 군왕이 난을 피하여 이 마을에 잠깐 머물렀다고 해서 불렸다 하며 기문은 1834년 조진충의 형제였던 조진구가 지었다고 한다. 초연정의 조성자 조진충은 학문에 심취하였으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 못마땅하여 은둔할 곳을 찾던 차에 현재 초연정 인근에 있는 조상의 묘소에 제사 올릴 때마다 자손들이 머물 곳이 마땅히 없자 일가의 도움을 얻어 정자를 건립하게 된 것이라 한다. 초연정은 옥천조씨의 제각으로 선조의 묘아래 위치하여 가족들이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면서도 자손들과 지인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기도 하는 다목적 공간이었으며 노년에 대비하여 마련한 은거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후에 옥천조씨 문중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강학하고 초연정의 이름을 지어준 송병선을 추모하는 곳이기도 했다.
원래 이곳은 대광사의 승려가 수석정을 짓고 수도했던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초연정의 자료를 집대성한 순천의 사학자 최인선 교수의 연구 덕분에 이곳의 조성목적과 경관구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1890년 송병선이 지은 초연정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뒷산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공간이 하나 있으니 (중략) 산이 겹겹이 둘러있고 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으며 인적이 드물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전에 진충이 처음 이곳에 찾아와 정자 하나를 엮었다. 암석이며 샘물, 폭포 등은 자연 그대로이며 소나무 오동나무 대나무 꽃등은 인공적으로 꾸민 것들이다. 옹은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략) 이곳에 찾아와 노닐곤 하며 아득히 세속에서 초탈한 사상을 지닌 듯하였다. 이곳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갔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찾아와 놀다가곤 하였다. 그의 큰 아들 재호가 중수를 하고 기와를 덮어 이전보다 더 낫게 꾸몄다 한다”.
현재 초연정 건물은 정면 3칸에 전후퇴로 단층 홑처마 팔작지붕에 기와로 되어 있다. 좌측 1칸이 마루이며 나머지 1칸 반 정도를 방으로 하였고 그 우측에 부엌으로 되어 있다. 지정보고서에 보면 초연정 전면의 계곡의 유량은 적은 편이며 물이 맑아 아름다운 바위와 암벽에 의지해 자라는 개서어나무 등이 활엽수 2차림이 잘 발달했다고 적고 있다. 옛 기록에는 이곳에 수석이 좋고, 숲이 깊고, 뽕나무 삼베나무가 풍부하다고도 했다. 원림의 구성요소에 관한 최 교수가 제시한 단서로는 1897년 초연정중수실기에 보면 정자, 담장, 연못, 누대, 큰 문 작은 문 등을 모두 손보았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 비교자료 추적을 통해 과거의 원형을 되찾길 기대해 본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최인선(2012), 순천 초연정에 대한 고찰, 문화사학(37).
국립문화재연구소(2014)명승지정 기준 내 경승지 개념 확립을 위한 기초연구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