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문경새재(聞慶새재, 명승 제32호) 입구에 옛길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문경새재의 장소성을 잘 반영한 주제 선정이라 하겠다. 또 이곳은 조선 시대 드라마나 영화에 단골로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에 보면 새재는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세상에서 ‘새재’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명칭을 두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사용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 시대에는 풀이 많이 나는 고개라는 의미로 ‘초점’으로 불렸으며 현재도 문경새재 제1관문 아래지역에 ‘상초리’, ‘하초리’ 등 풀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다(정창식,2015). 일반적으로는 험준한 고개를 빗대어 새들도 날아가기 힘든 고개라는 ‘조령’의 뜻으로도 많이 쓴다.
<문경새재 원경>
<문경새재 성곽 전경>
문경은 소백산맥의 남쪽사면에 있고 경상북도에서는 북서쪽에 위치하며 관문의 끝은 충북 괴산군과 접한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에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한 조선 시대 국방상의 요충지이자, 경제·사회·문화 유통로로 조선 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조선 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 구실을 했다.
<문경새재 문루>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선조 27년 안동출신 유성룡의 건의에 의해 조성이 시작되어 숙종 34년에 이르러 3개의 관문이 모두 설치되었다. 《여지도도서》 문경현 성지조에 의하면, 숙종 무자년(1708)에 조령의 마루인 영남과 호서의 경계에 있는 곳에 성을 쌓고, 응암 북쪽 1리에 있는 신충원이 쌓은 옛 산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어류산성은 조령과 마패봉, 부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말한다.
주흘관(제1관문)은 보존상태가 온전한 편이고 제2관문은 가장 먼저 축성된 곳으로 의미를 지니며 제2,3관문은 1900년대 초반 문 위의 누각은 없어지고 석축부만 남았다가 복원되었다.
<문경새재길>
문경새재는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문경새재는 험준하고 외진 곳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재는 도의 경계상에 위치하며 유곡역에 가까웠는데 동화원, 요광원, 신혜원 등의 원과 관련된 옛 지명을 보면 과거에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남을 벗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이 길은 과거를 보기위해 지나야하는 여정으로 유명해졌다.
지역을 벗어나 풍운의 꿈을 품은 선비들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첫 관문인 셈이다. 과거길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덕에 주변의 죽령이나 추풍령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이 문경새재를 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일도 제법 일어났다고 한다. 이는 '문경'이라는 의미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경의 지명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할 때 잠시 주흘산 어류동에 잠시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개경수복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는 의미에서 따온 지명이라 한다. 이 때문에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 추풍령은 추풍낙엽 등이 연상되어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라고 하니 인생의 갈림길에 있는 처지에 선 그럴 듯도 해 보인다.
문경새재를 드나들던 다양한 계층의 삶의 애환과 여정이 이곳에 서려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중 하나를 소개하면,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재를 넘다가 밤이 늦어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고 그 집에는 늙은 홀아비와 어린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처녀에게 반한 선비가 홀아비에게 딸을 아내로 맞이할 것을 청하고 겨우 승낙을 받아 다시 과거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하한 선비는 다시 찾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게 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처녀는 결국 목숨을 끊고 구렁이가 되어 이 재에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에게 나타나 괴롭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선비는 잘못을 뉘우치고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재 인근에 성황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문경새재에 얽힌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권선징악의 교훈과 함께 과거길로 유명한 점이 소재로 작용되었고 재를 넘던 당시 사람들에 의해 겹겹이 쌓여온 삶과 문화가 이야기로 탄생해 전해오는 것이다. 이밖에 문경새재는 근대 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아리랑 노랫말의 배경이기도 하다.
<문경새재 교구정>
1981년 문경새재도립공원은 공원지구로 지정되어 보전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옛길을 따라 계곡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문경새재는 관방시설로도 그 가치가 높은데 최근 강화관방유적과 같은 유산들이 세계유산 등재추진으로 주목을 끌게 된 것을 보면 문경새재도 무관하지 않다.
<문경새재 주변 계류 전경>
문경새재가 있는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뛰어나다. 옛길 주변의 교목층은 소나무, 신갈나무, 일본잎갈나무 등이 주류를 이루고 때죽나무, 생강나무, 함박꽃나무 등의 아교목층이 나타나기도 한다. 진입로 주변 낙엽수와 상록수 혼효림과 왼쪽 하천 경관이 탐방객들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과거길이라는 장소성을 부각하여 문경시의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 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최근 백두한국관광 100선중 1위에 선정된데 이어 한국관광의 별 생태관광자원부문을 수상하기도 한 가치 높은 명승이다.
<참고문헌>
사진제공 : 김중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 홈페이지
정창식(2015) 문경새재 전래이야기의 스토리텔링적 분석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옛길박물관(2014) 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 옛길박물관 옛길편, 대원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지난 2009년 문경새재(聞慶새재, 명승 제32호) 입구에 옛길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문경새재의 장소성을 잘 반영한 주제 선정이라 하겠다. 또 이곳은 조선 시대 드라마나 영화에 단골로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에 보면 새재는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세상에서 ‘새재’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명칭을 두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사용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 시대에는 풀이 많이 나는 고개라는 의미로 ‘초점’으로 불렸으며 현재도 문경새재 제1관문 아래지역에 ‘상초리’, ‘하초리’ 등 풀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다(정창식,2015). 일반적으로는 험준한 고개를 빗대어 새들도 날아가기 힘든 고개라는 ‘조령’의 뜻으로도 많이 쓴다.
<문경새재 원경>
<문경새재 성곽 전경>
문경은 소백산맥의 남쪽사면에 있고 경상북도에서는 북서쪽에 위치하며 관문의 끝은 충북 괴산군과 접한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에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한 조선 시대 국방상의 요충지이자, 경제·사회·문화 유통로로 조선 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조선 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 구실을 했다.
<문경새재 문루>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선조 27년 안동출신 유성룡의 건의에 의해 조성이 시작되어 숙종 34년에 이르러 3개의 관문이 모두 설치되었다. 《여지도도서》 문경현 성지조에 의하면, 숙종 무자년(1708)에 조령의 마루인 영남과 호서의 경계에 있는 곳에 성을 쌓고, 응암 북쪽 1리에 있는 신충원이 쌓은 옛 산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어류산성은 조령과 마패봉, 부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말한다.
주흘관(제1관문)은 보존상태가 온전한 편이고 제2관문은 가장 먼저 축성된 곳으로 의미를 지니며 제2,3관문은 1900년대 초반 문 위의 누각은 없어지고 석축부만 남았다가 복원되었다.
<문경새재길>
문경새재는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문경새재는 험준하고 외진 곳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새재는 도의 경계상에 위치하며 유곡역에 가까웠는데 동화원, 요광원, 신혜원 등의 원과 관련된 옛 지명을 보면 과거에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남을 벗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이 길은 과거를 보기위해 지나야하는 여정으로 유명해졌다.
지역을 벗어나 풍운의 꿈을 품은 선비들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첫 관문인 셈이다. 과거길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덕에 주변의 죽령이나 추풍령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이 문경새재를 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일도 제법 일어났다고 한다. 이는 '문경'이라는 의미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경의 지명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피난할 때 잠시 주흘산 어류동에 잠시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개경수복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는 의미에서 따온 지명이라 한다. 이 때문에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 추풍령은 추풍낙엽 등이 연상되어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라고 하니 인생의 갈림길에 있는 처지에 선 그럴 듯도 해 보인다.
문경새재를 드나들던 다양한 계층의 삶의 애환과 여정이 이곳에 서려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중 하나를 소개하면,과거를 보러가던 선비가 재를 넘다가 밤이 늦어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고 그 집에는 늙은 홀아비와 어린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처녀에게 반한 선비가 홀아비에게 딸을 아내로 맞이할 것을 청하고 겨우 승낙을 받아 다시 과거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과거에 급제하한 선비는 다시 찾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게 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처녀는 결국 목숨을 끊고 구렁이가 되어 이 재에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에게 나타나 괴롭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선비는 잘못을 뉘우치고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재 인근에 성황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문경새재에 얽힌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권선징악의 교훈과 함께 과거길로 유명한 점이 소재로 작용되었고 재를 넘던 당시 사람들에 의해 겹겹이 쌓여온 삶과 문화가 이야기로 탄생해 전해오는 것이다. 이밖에 문경새재는 근대 아리랑의 발상지이자 아리랑 노랫말의 배경이기도 하다.
<문경새재 교구정>
1981년 문경새재도립공원은 공원지구로 지정되어 보전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옛길을 따라 계곡부가 넓게 펼쳐져 있다. 문경새재는 관방시설로도 그 가치가 높은데 최근 강화관방유적과 같은 유산들이 세계유산 등재추진으로 주목을 끌게 된 것을 보면 문경새재도 무관하지 않다.
<문경새재 주변 계류 전경>
문경새재가 있는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뛰어나다. 옛길 주변의 교목층은 소나무, 신갈나무, 일본잎갈나무 등이 주류를 이루고 때죽나무, 생강나무, 함박꽃나무 등의 아교목층이 나타나기도 한다. 진입로 주변 낙엽수와 상록수 혼효림과 왼쪽 하천 경관이 탐방객들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과거길이라는 장소성을 부각하여 문경시의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 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최근 백두한국관광 100선중 1위에 선정된데 이어 한국관광의 별 생태관광자원부문을 수상하기도 한 가치 높은 명승이다.
<참고문헌>
사진제공 : 김중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 홈페이지
정창식(2015) 문경새재 전래이야기의 스토리텔링적 분석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옛길박물관(2014) 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 옛길박물관 옛길편, 대원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