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승]명승 제35호 성락원 (城樂園) 영벽지에 달을 담아 강호놀이를 즐기던 서울도심 속 비밀의 정원



성락원(城樂園, 명승 제35호)은 조선말 부터 근대를 거쳐 조성된 소위 자연풍경식 정원으로 1992년 사적 제378호에서 2008년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특히 성락원 주변은 계곡이 깊고 수석이 맑으며 도성에서도 멀지 않아 세도가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동국여지비고》의 한성부 명승편에 보면 “북저동으로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마을에 복숭아 나무를 벌려 심어서 봄철이 되어 복숭아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꽃구경을 하여 민간에서는 도화동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송석정>


 성락원은 낙산이 주봉이 되고 좌청룡, 우백호가 비교적 뚜렷한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한국역사경관연구회, 2008). 이 때문인지 현재는 주변에 대사관저와 고급주택지가 밀집하고 있다. ‘성안에 낙원’이라는 뜻을 지닌 지금의 명칭이 심상응의 4대손인 심상준 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불린 것은 아닌 듯하다. 현재로 보면 도심 속에 보물처럼 숨겨있는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절경을 지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성락원은 순조재위 연간에 황지사의 별장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하나 황지사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실정이었다(역사경관연구회, 2008). 영벽지 금석문을 근거로 추정되는 인물은 1903년경에 명성황후를 끝까지 모셨던 세력가 춘파(春波) 황윤명이다. 성락원을 경영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 황윤명, 의친왕 이강, 의친왕 장남인 이건, 선대의 소유를 되찾은 심상응 집안의 심상준을 들 수 있다.
 

<성락원 본재>


 이처럼 여러 인물들을 거쳐간 성락원의 공간구조는 크게 3시기로 구분된다. 기록상 확인되는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일만분의 일 지형도를 통해 살펴보면 성락원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의 별저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본재와 영벽지를 위주로 한 공간으로 보여진다. 

 영벽지 주변에 석축과 물길이 발견되는데 물길은 현재 송석정의 위에서 영벽지 좌측 흙담쪽을 돌아 본재 아래 우측 구릉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수되어 쌍류동천을 이루게 된다. 지금의 영벽지는 중도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자연암반부에 위치하는 초승달 모양의 소도 관찰된다. 그 주변을 좌측으로 석축이 두르고 있다. 영벽지 하단에도 T자형의 석축이 발견되며 우측으로 물길이 지나 본재 좌측의 석축 옆으로 흘러 남쪽으로 흐르게 된다. 본재 동남편에는 활엽수 식재지가 존재하고 영벽지 전면에 현존하는 느티나무가 식재된 위치에 활엽수가 표기되어 있다.
 

<영벽지>


 현재의 공간과 비교하면 송석정과 송석지가 1921년 지도 당시에는 보이지 않으며 송석정 반대편의 주택자리에 당시에는 아무 시설도 없었다. 그 후 심상응의 4대손인 심상준이 경영하던 1960년대는 성락원에 있어 가장 큰 공간구조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기존 계류를 중심으로 한 정원에서 각 공간이 쌍류동천과 용두가산이 있는 진입공간과 영벽지와 본재로 구성된 중심공간, 송석정이 있는 후원공간의 세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지금의 송석정 건물과 연못이 개축되고 송석정 연못과 그 밑의 계류사이의 축대와 주택으로 진입하기 위한 도로가 만들어진 시기로 볼 수 있다. 성락원과 송석정이란 이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송석정의 지붕을 뚫고 자라던 소나무는 자연 친화적인 건물로 유명세를 탔는데 지금은 고사되고 일부러 내놓은 지붕의 구멍은 매워졌다.



2008년 문화재청의 성락원 복원화사업에 의해 정원내의 견치석 축대 등이 제거되고 석교 등이 전통방식으로 새로 교체되면서 물길이 고쳐지는 등 공간구조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1960년대 성토된 길 속에 묻혔던 자연 암반부가 다시 노출된 것이다. 또 2013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성락원의 영벽지를 조사하면서 영벽지 내에 석조물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성락원의 중심공간인 영벽지는 연못의 중도에 괴석이 심겨 물에 잠겨 있었는데 그 괴석을 받치고 있던 바닥부 콘크리트를 제거하자 네모난 사각형의 구조에 반구형의 홈이 파인 석조물이 주변의 바위암반을 그대로 음각해 조성되어 있었다.


<영벽지 암반부>


 물확과 같은 형태를 가진 이 구조물은 1921년 지도에 나타난 영벽지의 모습과 유사하다. 또한 영벽지 주변에 새겨진 손문학과 관련된 금석문을 비교해 보면 “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물이 고인 웅덩이가 되었네. 내가 이물을 얻은 뒤부터는 작기는 하지만 강호놀이를 하게 되었구나”. 影碧池海生百泉會不流爲沼碧蘭頭 自吾得此水小作江湖遊  -계유년 오월 손문학 씀. 癸酉五月 孫文學書.  라는 글귀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영벽지는 지금과 같은 연못의 형태가 아닌 계류의 한 부분에 암반부를 물확과 같은 형태로 깎아 반구안에 물을 담아 연못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 이 가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영벽지 주변 3D 스캔 결과 주변 암반부 형태가 작은 폭포형태로 급경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면 개연성이 더욱 높아진다. 영벽지의 원형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자연의 형상 그대로를 기교삼아 이처럼 차원높은 정원술을 발휘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상징이며 급변하는 최첨단 도시인 대한민국의 서울 하늘아래 조선 시대 전통정원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온전히 이를 가꾸고 보살피는 사람들의 덕이다. 이 비밀의 정원을 우리는 오랫동안 간직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2013), 원림복원을 위한 전통공간 조성기법 연구.

한국역사경관연구회(2008), 한국정원답사수첩,도서출판 동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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