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사적 제444호)은 전국 최대 태실유적지로,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 중 장자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 태실 18기를 모셔놓은 곳이다. (단종의 태실은 세자 책봉 후 성주 법림산에 새로 조성) 경북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자리 잡은 태실은 왕자들의 태를 모시고 있는데 태실비가 앞줄에 11기, 뒷줄에 8기 놓여 있다. 세종은 재위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이 태실을 조성했다. 원래 이곳은 성주이씨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의 묘소가 있었던 곳이지만 그의 묘소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왕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처리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뤘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거나 왕겨에 태를 묻어 태운 뒤 그 재를 강물에 띄워 보냈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실을 마련해 전국의 명당에 안치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어 태를 안치하였다. 태를 보관하는 태실은 대개 태옹(胎甕)이라 불리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왕위를 직접 계승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봉해질 것을 감안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봉은 산 위에 석물로 안치하는데, 석물은 원형이고 아래로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리고 위에는 태함(胎函)을 석물로 덮어 안치하였다. 세종대왕자 태실을 한 바퀴 돌다보면 훼손된 석물을 몇 기 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로,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었다.
■ 주소: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 안내전화: 054-930-6773(성주군청)
◆ 성주 선석사(星州 禪石獅)

성주 선석산 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성주 선석사(星州 禪石寺)는 통일신라 효소왕 1년(692) 의상대사가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신광사’라는 절을 세웠다. 그 뒤 고려 공민왕 10년(1361) 나옹대사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고, 당시 새로운 절터에서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를 닦는다는 뜻을 가진 ‘선(禪)’자를 넣어 선석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숙종 10년(1684)에 중창하고, 영조 1년(1725) 서쪽 옛 터로 옮겼다가 순조 4년(1804)에 지금 있는 자리로 다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석사는 건너편 태봉에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어 태실 수호도량으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았으나 화재로 어필각이 소실되었다.
성주 선석사 영산회 괘불탱(星州 禪石寺 靈山會 掛佛幀, 보물 제1608호)은 숙종 28년(1702) 에 탁휘(卓輝)·법해(法海)·설잠(雪岑)·성징(性澄) 등이 제작된 괘불탱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내용을 표현한 불화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가로 464㎝, 세로 675㎝ 크기의 이 괘불탱은 표현된 색채나 필선(筆線)이 매우 세련되고 뛰어난 작품으로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괘불화로 꼽힌다. 절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경북 유형문화재 제474호)을 비롯하여 명부전, 칠성각, 산왕각 등이 남아있다.
■ 주소: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로 616-33
■ 안내전화: 054-933-9800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사적 제444호)은 전국 최대 태실유적지로,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 중 장자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 태실 18기를 모셔놓은 곳이다. (단종의 태실은 세자 책봉 후 성주 법림산에 새로 조성) 경북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자리 잡은 태실은 왕자들의 태를 모시고 있는데 태실비가 앞줄에 11기, 뒷줄에 8기 놓여 있다. 세종은 재위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이 태실을 조성했다. 원래 이곳은 성주이씨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의 묘소가 있었던 곳이지만 그의 묘소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왕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처리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뤘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거나 왕겨에 태를 묻어 태운 뒤 그 재를 강물에 띄워 보냈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실을 마련해 전국의 명당에 안치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어 태를 안치하였다. 태를 보관하는 태실은 대개 태옹(胎甕)이라 불리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왕위를 직접 계승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봉해질 것을 감안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봉은 산 위에 석물로 안치하는데, 석물은 원형이고 아래로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리고 위에는 태함(胎函)을 석물로 덮어 안치하였다. 세종대왕자 태실을 한 바퀴 돌다보면 훼손된 석물을 몇 기 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로,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었다.
■ 주소: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 안내전화: 054-930-6773(성주군청)
◆ 성주 선석사(星州 禪石獅)
성주 선석산 자락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성주 선석사(星州 禪石寺)는 통일신라 효소왕 1년(692) 의상대사가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신광사’라는 절을 세웠다. 그 뒤 고려 공민왕 10년(1361) 나옹대사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고, 당시 새로운 절터에서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를 닦는다는 뜻을 가진 ‘선(禪)’자를 넣어 선석사라 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숙종 10년(1684)에 중창하고, 영조 1년(1725) 서쪽 옛 터로 옮겼다가 순조 4년(1804)에 지금 있는 자리로 다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석사는 건너편 태봉에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어 태실 수호도량으로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았으나 화재로 어필각이 소실되었다.
성주 선석사 영산회 괘불탱(星州 禪石寺 靈山會 掛佛幀, 보물 제1608호)은 숙종 28년(1702) 에 탁휘(卓輝)·법해(法海)·설잠(雪岑)·성징(性澄) 등이 제작된 괘불탱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내용을 표현한 불화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가로 464㎝, 세로 675㎝ 크기의 이 괘불탱은 표현된 색채나 필선(筆線)이 매우 세련되고 뛰어난 작품으로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괘불화로 꼽힌다. 절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경북 유형문화재 제474호)을 비롯하여 명부전, 칠성각, 산왕각 등이 남아있다.
■ 주소: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로 616-33
■ 안내전화: 054-933-9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