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에 조선 시대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귀감이 되는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1452) 정승과 대학자이자 개혁정치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가 머물던 정자가 있다.

반구정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은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정자로, 낙하진이 가까이에 있어 원래 ‘낙하정(落霞亭)’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가장 오래 재상을 지낸 황희 정승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관을 지내고, 조선이 건국되자 사헌부 감찰을 비롯해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파주 반구정 사진제공=파주시청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반구정은 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이 정자는 황희 정승 사후에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를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불탔으며, 그 후 1967년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유적지 안에는 반구정을 비롯해 방촌영당, 방촌기념관, 경모재, 앙지대 등이 있다.
반구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화석정(花石亭,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은 율곡 선생이 자주 들러 제자들과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정자로,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율곡 이이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익혀 과거에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하고, 호조화랑을 시작으로 대사헌,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였으며 조선 시대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룬 대 유학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시대 세종 25년(1443), 율곡 선생의 5대 조부인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성종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이숙함(李淑瑊)이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화석정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화석정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 볼 수 있고, 서울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특히 화석정은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선생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 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유적정화사업을 통해 주변 정리되어 지금에 이른다.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은 끝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멀리 강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울음소리 석양의 구름 속에 끊기네.
< 율곡 선생이 8세에 지은 화석정 시 >
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에 조선 시대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귀감이 되는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1452) 정승과 대학자이자 개혁정치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가 머물던 정자가 있다.
반구정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은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정자로, 낙하진이 가까이에 있어 원래 ‘낙하정(落霞亭)’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가장 오래 재상을 지낸 황희 정승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관을 지내고, 조선이 건국되자 사헌부 감찰을 비롯해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파주 반구정 사진제공=파주시청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반구정은 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이 정자는 황희 정승 사후에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를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불탔으며, 그 후 1967년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유적지 안에는 반구정을 비롯해 방촌영당, 방촌기념관, 경모재, 앙지대 등이 있다.
반구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화석정(花石亭,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은 율곡 선생이 자주 들러 제자들과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정자로,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율곡 이이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익혀 과거에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하고, 호조화랑을 시작으로 대사헌, 이조판서까지 역임하였으며 조선 시대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룬 대 유학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시대 세종 25년(1443), 율곡 선생의 5대 조부인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성종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이숙함(李淑瑊)이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화석정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화석정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 볼 수 있고, 서울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특히 화석정은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선생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 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유적정화사업을 통해 주변 정리되어 지금에 이른다.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은 끝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멀리 강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울음소리 석양의 구름 속에 끊기네.
< 율곡 선생이 8세에 지은 화석정 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