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경관 가운데는 오랜 시간동안 인간 삶의 흔적이 현재까지 계승되어 오면서 이름난 명승이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생활문화 명승으로 구분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적극 발굴해 왔는데 지난 호에 이어 소개되는 옛길이 그 좋은 예이다.
옛길은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지형상 많이 나타나는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대표적 문화경관이기도 하다. 옛길은 자연에 순응하는 우리 선조들의 심성을 대변하듯 깊은 산속에 사람이 비껴 다닐만한 작은 통로를 빌리는 것 이외에 자연경관을 크게 훼손한 것이 없다. 산을 오가는 사람을 배려하여 되도록 완만한 지형을 택해 적당한 경사의 길을 만들고 이 길을 따라 물을 건너고 고개를 넘고 나면 쉴만한 자리에 작은 주막이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옛길 좌우에 늘어선 키가 큰 나무들은 주변 산세를 막고 트여주기를 반복하며 변화와 통일성을 통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노고를 덜어 주지 않았을까? 또 누군가에게 옛길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힘든 여정의 하나였기 때문에 먼저 지난 사람들의 인생이야기가 곳곳에 묻어 있기도 했다.
<죽령루>
옛길 중 명승으로 지정된 죽령 옛길(竹嶺 옛길, 명승 제30호)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해발 689m에 달하며, 소백산 제2 연화봉에서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지점으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관문의 하나였다. 주변지역에서 서울 왕래를 위해서는 이 길을 거쳐야만 했다. 죽령을 넘어 충북 단양군 영역의 옛길에는 보국사 터가 있으며, ‘장육상’이 남아 있다.
<죽령 옛길>
죽령 옛길의 역사를 보면 이렇다. 신라 시대 8대 임금 아달라왕은 영토 확장을 위해 소백산 너머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명령을 죽죽에게 내린다. 왕명을 받은 죽죽은 소백산 서쪽 계곡을 따라 산맥 능선의 안부를 넘는 고갯길을 개척하는데 이 고갯길이 바로 죽령 옛길이다(김학범, 2012).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AD 158)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리다’는 기록과 《동국여지승람》의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 길을 개척하고 지쳐 순사했고, 고갯마루에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죽령 옛길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또,《삼국사기》에 보면 삼국 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쟁패지로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해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죽령 이북의 10여 고을을 함락하였고, 이에 고구려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하였다고 한다. 죽령 옛길은 삼국 시대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장소로 고구려 군사들이 넘어 다녔고, 잃었던 땅을 회복한 신라군, 견훤을 물리친 고려의 왕건, 나라를 몽땅 바친 경순왕도 눈물을 흘리며 개성으로 갈 때 거쳐 갔던 곳이 바로 죽령 옛길이다(경북매일신문, 2015).
<죽령 옛길>
이 외에 잔운대, 촉령대, 소혼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퇴계 선생이 형 온계와 죽령 길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고 하며, 영주·안동·예천·봉화 등 경북 동북부지역에 살던 백성과 관원,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선비들, 보부상 등이 주로 이용했다. 고개가 험준하고 마을과 떨어져 있어 나그네의 괴나리봇짐과 보부상들의 짐을 노리던 산적 떼가 들끓던 곳이라 고갯길 초입에는 야간산행을 면하게 해주는 주막들이 늘어서 사시사철 번잡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차로 변에 죽령주막이 영업을 하며 이곳이 과거의 죽령임을 소박하게나마 체험하게 해준다.
<죽령 옛길>
켜켜이 쌓여온 역사적 장소이다. 그러나 다른 옛길들이 그러하듯 이 길도 교통수단의 발달과 신작로가 나면서 수십 년 동안 숲과 덩굴에 묻혀 잊혀질 위기에 처해하기도 했었다. 현재 죽령 옛길은 1999년 영주시 주관으로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복원하였으며 수년전부터 시작한 ‘죽령 옛길 걷기’ 행사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행장 재현, 야생화를 주제로 하는 숲해설, 과거 시험 재현 등의 행사가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죽령 옛길 초입부>
죽령 옛길은 역사·문화교육 및 테마탐방을 통한 체험의 장으로 옛길을 따라 형성된 계곡과 울창한 수림이 형성하는 터널경관, 소백산 주요 능선 등이 어우러진 주변의 산림경관 등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 산하 곳곳이 자동차로 갈 수 없는 곳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옛길은 편리함이라는 도구로서는 찾을 수 없는 우리 선조들의 체취와 금수강산의 경치를 느린 걸음으로 온전히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인용문헌>
김학범(2012) 명사칼럼 죽죽이 개척한 대재-죽령 옛길. 문화유산채널
마경대(2015) 영주 선비의 길. 경북매일신문
문화재청(2007) 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 2006-2007 천연기념물 명승
이원호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전통경관 가운데는 오랜 시간동안 인간 삶의 흔적이 현재까지 계승되어 오면서 이름난 명승이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생활문화 명승으로 구분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적극 발굴해 왔는데 지난 호에 이어 소개되는 옛길이 그 좋은 예이다.
옛길은 산지가 많은 한반도의 지형상 많이 나타나는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대표적 문화경관이기도 하다. 옛길은 자연에 순응하는 우리 선조들의 심성을 대변하듯 깊은 산속에 사람이 비껴 다닐만한 작은 통로를 빌리는 것 이외에 자연경관을 크게 훼손한 것이 없다. 산을 오가는 사람을 배려하여 되도록 완만한 지형을 택해 적당한 경사의 길을 만들고 이 길을 따라 물을 건너고 고개를 넘고 나면 쉴만한 자리에 작은 주막이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옛길 좌우에 늘어선 키가 큰 나무들은 주변 산세를 막고 트여주기를 반복하며 변화와 통일성을 통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노고를 덜어 주지 않았을까? 또 누군가에게 옛길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힘든 여정의 하나였기 때문에 먼저 지난 사람들의 인생이야기가 곳곳에 묻어 있기도 했다.
<죽령루>
옛길 중 명승으로 지정된 죽령 옛길(竹嶺 옛길, 명승 제30호)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해발 689m에 달하며, 소백산 제2 연화봉에서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지점으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관문의 하나였다. 주변지역에서 서울 왕래를 위해서는 이 길을 거쳐야만 했다. 죽령을 넘어 충북 단양군 영역의 옛길에는 보국사 터가 있으며, ‘장육상’이 남아 있다.
<죽령 옛길>
죽령 옛길의 역사를 보면 이렇다. 신라 시대 8대 임금 아달라왕은 영토 확장을 위해 소백산 너머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명령을 죽죽에게 내린다. 왕명을 받은 죽죽은 소백산 서쪽 계곡을 따라 산맥 능선의 안부를 넘는 고갯길을 개척하는데 이 고갯길이 바로 죽령 옛길이다(김학범, 2012).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AD 158)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리다’는 기록과 《동국여지승람》의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 길을 개척하고 지쳐 순사했고, 고갯마루에 죽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죽령 옛길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또,《삼국사기》에 보면 삼국 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쟁패지로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해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죽령 이북의 10여 고을을 함락하였고, 이에 고구려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하였다고 한다. 죽령 옛길은 삼국 시대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장소로 고구려 군사들이 넘어 다녔고, 잃었던 땅을 회복한 신라군, 견훤을 물리친 고려의 왕건, 나라를 몽땅 바친 경순왕도 눈물을 흘리며 개성으로 갈 때 거쳐 갔던 곳이 바로 죽령 옛길이다(경북매일신문, 2015).
<죽령 옛길>
이 외에 잔운대, 촉령대, 소혼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퇴계 선생이 형 온계와 죽령 길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고 하며, 영주·안동·예천·봉화 등 경북 동북부지역에 살던 백성과 관원,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던 선비들, 보부상 등이 주로 이용했다. 고개가 험준하고 마을과 떨어져 있어 나그네의 괴나리봇짐과 보부상들의 짐을 노리던 산적 떼가 들끓던 곳이라 고갯길 초입에는 야간산행을 면하게 해주는 주막들이 늘어서 사시사철 번잡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차로 변에 죽령주막이 영업을 하며 이곳이 과거의 죽령임을 소박하게나마 체험하게 해준다.
<죽령 옛길>
켜켜이 쌓여온 역사적 장소이다. 그러나 다른 옛길들이 그러하듯 이 길도 교통수단의 발달과 신작로가 나면서 수십 년 동안 숲과 덩굴에 묻혀 잊혀질 위기에 처해하기도 했었다. 현재 죽령 옛길은 1999년 영주시 주관으로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복원하였으며 수년전부터 시작한 ‘죽령 옛길 걷기’ 행사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행장 재현, 야생화를 주제로 하는 숲해설, 과거 시험 재현 등의 행사가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죽령 옛길 초입부>
죽령 옛길은 역사·문화교육 및 테마탐방을 통한 체험의 장으로 옛길을 따라 형성된 계곡과 울창한 수림이 형성하는 터널경관, 소백산 주요 능선 등이 어우러진 주변의 산림경관 등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 산하 곳곳이 자동차로 갈 수 없는 곳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옛길은 편리함이라는 도구로서는 찾을 수 없는 우리 선조들의 체취와 금수강산의 경치를 느린 걸음으로 온전히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인용문헌>
김학범(2012) 명사칼럼 죽죽이 개척한 대재-죽령 옛길. 문화유산채널
마경대(2015) 영주 선비의 길. 경북매일신문
문화재청(2007) 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 2006-2007 천연기념물 명승
이원호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